과거를 돌아보면서 현재를 찾을 수 있는 곳 영일 민속박물관
우리나라 고유문화가 이루어진 과정에 있어 그 기초적인 역할은 일상생활에 사용되었던 각종 민속 생활용구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으나 급변하는 현대 물질문명에 의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영일군과 영일문화원이 민속자료 수집운동을 전개하여 1차로 2,650점의 귀중한 자료를 모아 조선조 헌종 1년(1835)에 건립된 제남헌(옛 흥해군의 동헌)에 자료를 전시하여 1983년 10월 29일 영일민속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그후 1985년에 새 전시관을 신축하여 토기, 생활용구류, 농어기구류,관혼상례용구,고서적류, 의관류등 총 4,600여점의 자료를 재분류 전시하였으며,특히 여기에 전시된 자료는 이 고장에서 옛부터 조상들이 사용하였던 고유의 유품들로서 포항시 지역 특유의 향토문화형성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영일민속박물관은 1985년 1월 경상북도 향토 역사관으로 지정되었으며,1993년 3월 25일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박물관으로 지정되어 향토문화 창달을 위한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관람이다. 신정과 설, 추석연휴, 공휴일 다음날, 월요일(정기휴관)은 휴관한다. 천천히 둘러보아도 1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영일민속박물관을 들어서면 정면에 600여년이 넘은 회화나무가 우뚝 자리잡고 있고 입구 좌측에 전시실이 있어 먼저 둘러 보았다.
600여년생의 회화나무는 과거에 흥해 일원이 호수지역으로 수질이 좋지 않아 피부병 환자가 많아서 이 나무의 식재를 관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그 옛날에도 회화나무는 엄청난 수질정화능력이 인정되었던 갓 같다.
이 건물은 흥해의 동헌(東軒)이었다고 전해지는 것이다. 건립연대는 "도광 십오년(1835) 이라는 상량문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여지도서와 경상도읍지에는 흥해 읍성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5년에 흥해읍 사무소 자리로 옮겨서 읍회의실로 사용되다가 1976년에 다시 원래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현재는 영일민속박물관으로 사용 되고 있다.
옛 자료를 많이 사용하고,고증을 거쳐 원형에 충실하게 복원 했다지만,상당부분 상실한 상태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동헌 건물이 많이 남지 않아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제남헌 제1전시실에는 일상생활에 실제로 사용하던 농기구 및 어구류 등을 통해 조상들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고, 몇몇 농기구와 어구류는 현재까지도 농가나 어촌 등에서 사용되고 있어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냐부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척화비는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를 치른 뒤 흥선대원군이 쇄국의 결의를 굳히고 온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 4월을 기해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요소에 세운 척화비 중 하나이다. 포항의 장기면사무소에도 장기읍성 안에 세워져 있던 척화비를 1951년 4월에 장기지서 입구에서 찾아 장기면사무소 정문 왼쪽 도로변에 세워 두었다가 1990년 12월 1일 장기면사무소 정원에 이설한 척화비가 있다.
이 비석은 2001년 8월 6일 (구)칠포도로 (흥해읍 칠포리 암각화군 앞)에서 발견된 대원군척화비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戒我萬年子孫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丙寅作辛未立
계아만년자손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병인작신미립
우리의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요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병인년(1866)에 쓰고 신미년에(1871) 세우다.
제2전시실 민속관에는 관혼상제, 방앗간, 서당, 여인들의 안방, 생활용구 등 친근하고 정겹게 느껴지는 일상용품이 전시되어 있어 조상들의 생활상과 도구 및 장식류 등을 자세히 보고 이해 할 수 있는 곳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야외전시장에는 서민들이 생활하는 초가와 곡식을 찧는연자방앗간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이 기념비는 산남의병의 숭고하고 청사에 길이 남을 항일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고 그분들의 명예 선양과 후세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고취 시키고자 1967년 3월 29일 건립한 현충시설물로 산남의진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남지방의 애국지사들이 의병을 일으켜 이를 산남의진(山南義陳)이라 명명하였고, 초대 대장은 정환직의 아들 정용기 였으며, 그가 전사한 후 제2대 정환직대장이 의병을 이끌다 순직하자 제3대 최세윤대장이 산남의진 을 수습하여 일군과 항쟁을 계췻하다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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