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가 만발한 경주 첨성대 꽃단지를 돌아보고 10분거리에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국보 제30호인 모전석탑이 있는 분황사로 향했다.
모전석탑(模塼石塔)은 벽돌탑을 모방한 석탑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가공하여 쌓거나 모서리기둥을 생략하고 지붕돌의 윗면을 계단식으로 만든 탑을 말한다.
분황사는 문화재보호법 제39조에 따라 관람료를 징수하고 있다.
입구에 있는 주차장은 무료로 이용 가능하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동절기는 오후 5시) 관람할 수 있다.
입장료는 성인 2,000원, 청소년과 군인은 1,500원, 어린이는 1,000원이며 20인 이상 단체는 청소년 1,300원, 어린이 900원이다. 입구에 무인매표소와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이 있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법등(法燈)을 이어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 분황사 창건 직후에는 당대의 명승 자장율사(慈藏律師:590〜658)와 원효대사(元嘵大師:617〜686)가 주석(駐錫)하였다.
분황사에는 솔거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와 경덕왕 14년(755)에 강고내말(强古乃末)이구리(銅) 306,700근으로 주성하였던 약사여래상등이 있어 사격을 높였다.
분황사는 당간과 지주 • 중문 • 석탑 • 3금당 • 강당 • 회랑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나, 고려시대 고종 25년(1238)에 몽고침입과 조선왕조시대의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을 차례로 겪으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버리고 광해군 원년 (1609)에 중창하고 새로 주조한 보광전과 약사여래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등이 사역을 지키고 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신라의 석탑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모전석탑(模塼石塔 국보 제30호) • 원효대사의 비석을 세웠던 화쟁국사비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 구황동 당간지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 신라 호국룡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석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등의 석조문화재가 남아있다. 분황사 안내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은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므로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탑이다. 흑회색의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이다. 지금은 3층이지만 원래 7층 혹은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에 일본인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수리하였다.
바닥돌은 자연석으로 널찍하게 쌓았고 네 모서리에 사자상을 두었다. 1층은 면마다 화강암으로 문을 만들고, 문 양쪽에 금강역사상을 2구씩 배치했다. 2층과 3층은 높이가 현격하게 줄었고, 지붕은 아래위쪽 모두 계단식으로 쌓았다. 탑 꼭대기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연꽃 장식이 있다.
1915년에수리할 때 2층과 3층사이에서 돌사리함이 발견되었다. 함에는 녹유리 조각,구슬,가위, 금 • 은바늘과 은함, 숭녕통보(崇寧通寳), 상평오수전(常平五銖錢) 등이 담겨 있었다. 이 동전으로 보아 고려 숙종에서 예종 때인 12세기 초에도 탑을 수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돌사리함에는 타이완, 오키나와 등지에 서식하는 조개의 껍질도 포함되어 있어 당시 신라의 대외 교역에 대한 단서가 된다. 분황사 모전석탑 안내문
이 불상은 분황사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약사여래입상이다.
1998년 보광전을 해체하던 중 발견한 기록에 의하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었고,불상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2017년에 엑스선 형광 분석으로 이 불상이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으로 주조되었음이 밝혀졌다. 불상의 겉면에 흙을 발라 조각하고 금을 입힌 시기는 불상이 들고 있는 약그릇의 뚜껑에 중수와 개금 연도로 기록된 1774년일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된 불상 중에서 동으로 만들어진 것은 극히 드문 경우이며,또 크기가 3.5m에 달하는 것으로는 분황사의 이 불상만 있다고 한다.
대원심보살께서는 불기 2404년(1860)에 태어나시어 불기 2479년(1935)에 열반하셨다. 어려서부터 불도에 지극정성으로 정진하셨는데 불기 2477년(1933) 살아 계실때 치아에서 백옥(부처님모양)의 사리가 나와 온 세상이 경탄하여 그 불도 정성을 기리고자 이 사리탑에 봉안 분황사에 모셨다고 한다.
이 석정은 분황사에 남아 있는 신라 시대의 우물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물고기로 변한 우물’ 이라고 해서 호국용변어정으로도 불린다.
『삼국유사』에 이 우물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 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용이 살았다.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 사신이 주술을 써서 이 용들을 물고기로 둔갑시켜 잡아갔다. 이 용들의 부인이라는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남편을 찾아줄 것을 청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자 물이 한 길이나 솟아오르고 용들이 기뻐하며 뛰었다.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밝은 지혜에 감복했다고 한다.
이 우물은 틀의 높이가 약 70cm로 외부는 팔각 모양이고, 내부는 원형이다. 남아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하며 지금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그러나 이 우물에는 조선 시대에 분황사에 있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곳에 넣었다는 아픈 이야기가 전한다.
분황사 화쟁국사비부는 원효대사(617〜686)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의 받침돌이다.
고려 숙종 6년(1101)에 원효대사가 동방의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겨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웠다. 그 후 추사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이 비석 받침을 발견하고 이를 고증한 글귀를 새겨 두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평장사 한문준이 비문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변에서 찾은 비석 조각이 일부 전해지고 있다.
비석 받침의 윗면에 비석을 꽂아 세웠던 직사각형 홈이 파여 있고,윗면의 모서리는 떨어져 나갔다.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 네모난 면의 모서리를 장식했던 기둥 문양. 코끼리 눈을 형상화한 문양이라고도 한다.)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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