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남아 있는 234개 향교 탐방을 목표로 현재 약 150여 곳의 향교를 다녀왔다.지난주에는 도고온천에서 있었던 세미나에 다녀오며 예산군에 있는 대흥향교와 예산향교, 아산 신창향교와 홍성 홍주향교(洪州鄕校)를 방문했다. 234개의 향교 가운데 147번째 방문한 향교이다.
천년의 시간을 간직한 도시인 홍성은 고려 현종 9년(1018년) 홍주로 명명됐으나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홍주군과 인근 결성군을 합쳐 홍성군으로 명명하면서 바뀌었다.
홍주의병이 발기했던 곳이며 홍주성 전투와 함께 저항정신이 높았던 고을인 홍주의 항일정신을 말살하고자 하는 일제의 의도가 짙어 현재는 옛 지명인 홍주(洪州)를 되찾자는 움직임이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홍주향교 하마비에는 누구든지 모두 다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대소인원 개하마(大小人員 皆下馬)'라고 새겨져 있다. 과차자개하마(過此者皆下馬)라고 새겨져 있는 하마비도 있는데 이 곳을 지나가는 사람은 누구나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홍주향교는 낮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데, 앞에는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뒤에는 제사공간인 대성전이 있는 경사지에 세워진 향교의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방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전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고, 축문을 태우는 망료대, 어둠을 밝히는 청료대, 손을 씻는 관수대. 제사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가 있다. 명륜당 옆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이 있다.
홍주향교는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홍주에 세운 관학 교육기관으로 정확하게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1408년(태종8)과 1420년(세종2)에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향교의 위치가 홍주의 북쪽 3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현재의 위치로 추측되며, 경국대전에 의하면 홍주향교에는 조선전기에 종6품의 교수가 파견되었고, 실제로 1609년(광해군 1)에 신정의(辛廷懿)가 홍주 제독관으로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홍주향교의 보수내역은 1871년(고종 8)에 향교의 대성전을 중수하였고, 1880년에는 홍주목사 김윤현(金胤鉉)에 의해 동무·서무와 중삼문(中三門)이 신설되었다. 1893년에는 대성전이 중수되었고, 1914년에는 대성전과 후원(後垣)이 수선되었으며, 1924년에는 문묘 전부가 수보(修補)되었다. 1958년·1972년·1978년·1995년에 중·개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1997년 12월 17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명륜당 우측에는 최근에 신축한 전사청이 자리잡고 있다.
동재와 서재는 일제강점기에 훼철되었다고 하는데 이철학 홍주향교 전교께서 동재와 서재의 복원과 대성전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등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신다.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 2현과 국내의 18현을 배향하고 있으며, 매월 삭망으로 분향례를,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는 가장 큰 제사인 석전대제(釋奠大祭)를 봉행하고 있다.
삭전대제는 1986년 11월 1일 대한민국의 국가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홍주향교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 1칸은 툇간으로 개방하고 있고 좌우측에 동무와 서무, 그리고 동무 아래쪽에는 제기고가 있다.
특히 홍주향교에는 축문을 태우는 망료대, 어둠을 밝히는 청료대, 손을 씻는 관수대 등 유교건축의 석물이 전해지고 있다.
홍주향교 칠의사는 1894년 갑오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군들이 홍주향교를 침입해 점거하려는 것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일곱명의 유생들이다. 홍주향교에서는 매년 칠의사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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