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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향교와 서원/전라북도

화산서원 · 황방촌영정 - 한국의 서원 전라북도 진안군 안천면

by Yeongsik_Im 2025.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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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서원 · 황방촌영정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 906 에 위치하고 있는 장수 황씨 문중의 사당인 화산서원은  조선 전기의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 (黃喜, 1363~1452) 의 영정을 안치하고, 그의 차남 황보신(黃保身)과 5대손 황징(黃澄) 등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1922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970년에 중수되었습니다. 서원 인근에는 문중 인물인 황교찬(黃珓燦)의 효자각과 육씨 부인의 열녀각이 있습니다.

화산서원
화산서원 외삼문

외삼문 좌측에는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유형 제12호 화산서원과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인 황방촌영정 문화재 안내판이 각각 세워져 있습니다.

화산서원은 평평한 대지위에 긴 네모꼴의 담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 담 안은 남쪽의 두 구역으로 나뉘어 뒷부분 뒷담 쪽 중앙에 남향의 사당이 있고 그 앞쪽 왼쪽 가, 앞부분 동쪽 가에 서향의 강당이 있으며 양쪽은 내삼문으로 연결됩니다.

화산서원 내삼문

서원의 가장 안쪽 중앙에 사당이 있고, 사당 앞쪽 우측에는 강당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앞쪽 3칸은 마루, 뒤쪽 3칸은 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면에  華山書院(화산서원)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고, 방에는 황희의 영정과 위패, 황보신과 황징의 위패 등이 모셔져 있습니다, 황희 영정은 지방유형 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내삼문은 와가 3칸의 솟을 대문입니다.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인 황방촌영정은 조선 전기의 재상을 지낸 방촌 황희의 초상화입니다. 이 초상화는 황희가 62세 되던 해의 모습으로 오사모(관복을 입을 때에 쓰던 모자)를 쓰고 쌍학흉배(한 쌍의 학을 수놓은 흉배)와 각대를 갖춘 관복 차림의 반신상입니다.

황방촌영정

이 초상화는 경북 상주의 옥동서원에 소장되어 온 것을 조선 현종 때인 1844년 옮겨 그린 것인데, 모사본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 받아 황희의 국가 표준 영정으로 지정된 바 있습니다. 조선 후기 문신인 홍여하는 황희의 초상화를 보고 '평소 집에 있을 때는 그저 온화하여 어린 종들이 물려들어 수염을 잡아당기며 먹을 것을 내라고 조르기를 마치 부모에게 하듯 해도 내버려두지만, 관복차림에 홀을 꽂고 묘당에 나서면 조정이 숙연하였다,'라는 시문(詩文)을 남겼습니다.   

화산서원 강당과 내삼문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 지붕의 와가로서 뒷 양쪽이 사방 1칸씩의 방, 그 사이의 가운데 1칸과 앞의 3칸이 마루로 나누어 마루는 마치 ㅗ자형을 이루며 ㅗ자 꼭대기의 문은 길에 면하여 출입문이 되고 있습니다. 마루의 천정에는 상량문이 보이고 벽에는 현판이 있습니다. 외삼문은 솟을삼문이 아니고 일반 주택의 대문과 같은 쪽대문입니다.

육씨부인 열녀각

조선 후기 진안 출신 의병장인 황대성(黃大成)은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수 백 명을 이끌고 각지에서 왜병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황간(黃澗)에서 체포되어 일본에 포로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그의 충의와 행동에 감복한 일본인 옥리(獄吏)의 주선으로 귀국하기에 이르렀다. 『선조실록』에는 1600년(선조 33) 4월 13일에 경상도 수군절도사 유형(柳珩)이 “3월 18일에 작은 배[小船] 1척이 먼 바다에서 들어오기에 포를 쏴서 잡고 보니, 그 배엔 살아 돌아오는 우리나라의 남녀 30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거제(巨濟)의 교생(校生) 옥신변(玉信辨)과 용담(龍潭)의 교생 황대성(黃大成)의 말을 들어보니, 수길(秀吉)이 죽은 뒤 그의 아들이 13세 나이로 즉위하였으며 한 명의 왜추(倭酋)가 섭정(攝政)하고 있는데, 여러 곳의 왜장(倭將)들이 왜도(倭都)에 모여 서로 공격하고 있으므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올 기세는 전혀 없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한 장계로 보면, 일본에서의 경험은 임진왜란 이후 부족한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일조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후 부인 옥천 육씨가 순절한 것을 알고는 뒤따라 자결했다. 부인인 옥천 육씨는 남편이 의병을 이끌고 싸우러 나간 뒤에 몸종 천분(千分)과 같이 난을 피하여 상배실 앞 구례말 남쪽 산 불공 터에 움막을 짓고 숨었으나 왜군에게 붙들려 욕을 당하게 되자 둘이 함께 자결하였다.
디지털진안문화대전 황대성

열녀육씨정려각
열녀육씨정려중수기
옥전 육씨 정려

열부통정대부황대성처옥천육씨지려 (烈婦通政大夫黃大成妻沃川陸氏之閭)

황교찬 효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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