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선릉과 정릉 -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산왕릉 서울 선릉 · 정릉
서울 선릉과 정릉은 2호선 분당선 선릉역 10번출구에서 도보 7분, 9호선 분당선 선정릉역 3번출구에서는 도보 16분 정도 소요됩니다. 저는 선정릉역을 이용했는데 시간은 좀 더 걸렸지만 돌담길을 따라 걷는 내리막 길이기 때문에 천천히 걸어 볼 만 했습니다. 강남 도심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비교적 한적하고 조용히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관람시간은 3월~10월 06:00~21:00 (입장마감20:00), 11월~1월 06:30~17:30 (입장마감16:30), 2월 06:00~18:00 (입장마감17:00)입니다. 매주 월요일은 정기휴일이며 정기휴일이 공휴일 및 대체공휴일과 겹칠 경우에는 개방하며, 그 다음의 첫 번째 비공휴일이 정기휴일입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으로 서울 선릉과 정릉은 선릉, 정릉, 정현왕후릉, 재실, 역사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각의 능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이 있습니다.
저는 매표소를 들어서면 우측으로 가까운 곳에 정릉이 있어 정릉 - 정현황후릉 - 선릉 - 역사관 - 재실 순으로 돌아보았는데 그 반대로 관람하셔도 됩니다. 여유있게 돌아 볼다면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 잡으시면 됩니다.
정릉(靖陵)
향로와 어로입니다. 향로는 제향을 지낼 때 혼령을 위한 향이 지난가는 길이고, 어로는 제향을 지내러 온 임금이 걷는 길입니다. 관람을 하실때는 향로는 밟지 마시고 어로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신계(神階)와 어계(御階) 역시 향로와 어로와 같습니다. 정자각을 오르 내일때에는 신계는 밟지 마시고 어계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정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능이다. 중종은 1544년에 세상을 떠나 다음 해인 1545년(인종 1)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 서쪽 언덕(현 고양 서삼릉 내 철종의 예릉 자리)에 능을 조성하고 능의 이름을 희릉과 함께 정릉이라 하였다. 그러나 정릉은 1562년(명종 17)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에 의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문정왕후는 당시 봉은사 주지였던 보우와 논의하여 중종의 능을 이곳으로 옮겼는데, 이는 문정왕후 본인이 중종의 묻히기를 원해서였다. 그러나 옮긴 정릉이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침수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문정왕후는 세상을 떠난 후 정릉이 아닌 현재 서울 노원구 태릉에 묻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종과 세 왕비(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의 능은 모두 따로 흩어지게 되었다. 정릉은 선릉과 마찬가지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능이 파헤쳐져 재궁(梓宮, 관)이 불에 타는 피해를 입었고, 1593년(선조 26) 8월에 다시 장례를 치렀다.
정릉은 『국조오례의』의 예에 따라 조성되어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둘렀고, 문석인, 무석인,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의 석물을 배치하였다. 현재 정릉 능침에 있는 석물은 모두 1562년(명종 17)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새로 제작하였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누리집 정릉(靖陵) 이야기
중종(재세 : 1488년 음력 3월 5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 재위 : 1506년 음력 9월 2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로 1488년(성종 19)에 태어났다. 1494년(성종 25)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이복형 연산군이 폐위되자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1506년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은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어 반정을 계획하였다. 1506년 음력 9월 1일, 반정 세력들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집결시키고, 경복궁에 있는 정현왕후(왕대비)에게 반정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정현왕후는 반정 세력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옹립을 허락하였다. 이후 반정 세력들은 임사홍과 신수근 등을 죽이고 연산군이 있는 창덕궁을 에워싸고 옥사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다음날, 박원종 등은 창덕궁에 들어가 연산군을 폐위하는 데 성공하였고, 국새를 경복궁으로 가져가 진성대군을 왕위에 올렸다.
중종은 재위기간 동안 연산군 재위시절의 잘못된 정치와 제도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유교적 향촌질서를 자리 잡게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정치적으로도 개혁을 위하여 조광조 등 선비들을 등용하여 기존의 훈구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급진적인 정책이 큰 반발을 불러와 많은 선비가 죽임(기묘사화)을 당하였다. 이후 1544년(중종 39) 창경궁 환경전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누리집 중종(中宗) 이야기
정현왕후릉
선릉비 음기에 보면 조선국 성종대왕 선릉과 그 옆에 정현왕후 부좌강(좌측 언덕에 모심)이라고 새겨져 있는 정현왕후릉입니다. 계비저순화혜소의흠숙 정현왕후 윤씨는 천순 6년(1462) 6월 25일 태어나 성화 9년(1473) 처음으로 숙의에 봉해졌고 경자년(1480) 10월 왕비에 책봉됐습니다. 가정 9년(1530) 8월 22일 69세로 승하하시어 10월 29일 대왕릉 좌측 언덕의 남서향 둔덕에 장사지냈습니다.
정현왕후 윤씨(재세 : 1462년 음력 6월 25일 ~ 1530년 음력 8월 22일)는 본관이 파평인 영원부원군 윤호와 연안부부인 전씨의 딸로 1462년(세조 8) 신창 관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윤창년(尹昌年)이다.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이 되어 숙의(淑儀, 종2품)에 봉해지고, 1479년(성종 10)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위되자 1480년(성종 11)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현왕후는 왕비가 된 후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고, 연산군도 친어머니를 정현왕후로 알고 자랐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라는 것을 알고도 정현왕후에 대한 예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현왕후는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자순왕대비가 되었으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때 연산군을 폐위하고 친아들 진성대군(중종)의 즉위를 허락하였다. 이후 1530년(중종 25)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국가유산청 궁릉유적본부 누리집 정현왕후(貞顯王后) 이야기
이 노출되어 있는 난간석주는 조선시대 정현왕후릉 조성 당시 또는 그 후 보수과정에서 파손되어 능 주변에 묻혀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관람로가 신설된 후 토양이 빗물에 일부 유실되어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고 살명하고 있습니다. 현재 정현왕후의 능은 능제 형식에 맞게 12개의 난간석주로 완전하게 구서오디어 있습니다.
선릉(宣陵)
선릉은 조선 9대 성종과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선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성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선릉은 1494년(성종 25)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인 1495년(연산군 1) 광주 학당리인 현재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원래 이 자리는 4대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선릉이 조성되면서 광평대군묘역은 현 강남구 수서동으로 옮겼다. 이후 1530년(중종 25) 정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선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선릉은 정릉과 함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능을 파헤쳐 재궁(梓宮, 관)까지 불에 타는 피해를 당하여, 1593년(선조 26) 7월에 다시 장례를 치렀다.
선릉은 『국조오례의』의 예에 따라 조성되었는데, 성종의 능침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둘렀고, 정현왕후의 능침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그 외 문석인, 무석인,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은 두 능 모두 비슷한 형태이다. 국가유산청 궁릉유적본부 누리집 선릉(宣陵) 이야기
성종(재세 : 1457년 음력 7월 30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 재위 : 1469년 음력 11월 28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은 왕으로 추존된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1457년(세조 3)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잠시 궁중에서 키웠는데, 성품이 작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461년(세조 7) 잘산군(者乙山君*)에 봉해졌고, 1469년(예종 1) 작은 아버지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 정희왕후(세조의 왕비)의 명으로 13세의 나이로 경복궁 근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7년 동안 받았으며, 1476년(성종 7) 친정(親政)을 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세조 대부터 편찬하던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1485년(성종 16)에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 23)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하여 법제를 정비하였다. 또 국가 의례를 정리한 『국조오례의』를 완성하여 반포하였고,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악학궤범』 등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선비(사림세력)들을 등용하여 기존 정치 세력인 훈구세력과 국정의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이후 1494년(성종 25)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국가유산청 궁릉유적본부 누리집 성종(成宗)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