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방방곡곡/제주도

제주 관덕정과 제주목 관아

by Yeongsik_Im 2021. 11. 8.
728x90
반응형

관덕정 觀德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 2동에 있는 정자인 관덕정은 조선 세종 30년(1448)에 제주 목사 신숙청(辛淑晴)이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상무 정신을 함양할 목적으로 창건하였다. 보물 제322호로 보물 정식 명칭은 ‘제주 관덕정(濟州觀德亭)’이다. 제주에 현존하는 건축물 가운데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관아 건물이다. 사진은 2020년 12월 26일 촬영했다.

관덕정
관덕정 대들보에는 십장생도, 적벽대첩도, 대수렵도 등의 격조 높은 벽화가 그려져 있고, 편액은 안평대군의 친필로 전해오고 있다.
관덕정은 이중기단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짜리 단층 팔작지붕으로 처마가 긴 것이 특징이다.
관덕정에는 앞쪽 좌우에 한 쌍 그리고 뒤뜰 좌우에 한 쌍의 돌하르방이 서 있다.


제주목 관아

제주목관아 외대문

제주목관아는 제주시 삼도(三徒) 2동 43-3번지에 있는 조선시대 제주도 행정중심지이던 관아 터이다.

제주대학 조사단이 1991년 10~12월과, 92년 5~12월의 2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여러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이와 함께 조선시대 제주목 관아의 주요시설인 동헌(東軒), 내아(內衙) 건물터 등의 위치와 규모가 확인됨으로써 이 곳이 고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의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 중요한 유적지였음이 밝혀져, 이 곳 남서쪽에 있는 관덕정(보물 제322호)도 포함하여 사적 제380호로 1993년 3월 31일 지정되었다.

우련당

관아시설은 1434년(세종 16)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 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골격이 이루어 졌으며,조선시대 내내 중 ·개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때 집중적으로 훼철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볼 수 가 없었다고 한다.

제주시에서는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 . 행정 .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제주의 관아를 원래의 양식으로 복구하고자,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를 마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화층과 함께 문헌상에 나타난 중심건물인 홍화각 • 연희각 • 우련당 • 귤림당 등의 건물터와 유구가 확인되고 유물도 출토되었다.

복원사업에 소요되는 기와 5만여장 전량을 헌와 한 30만 제주시민의 혼을 담아 민관이 합심하여 복원된 제주목 관아는 20세기를 마감하는 1999년 9월에 시작하여 새로운 세기인 2002년 12월에 복원을 완료하였다.

우련당 友蓮堂 Wooryeondang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1고주 5량구조, 공포는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우련당은 1526년(중종 21)에 이수동 목사가 성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거나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하기 어렵다 하여,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연꽃을 심은 뒤 그 곳에 세웠던 정자이며 연회장소로 사용되던 곳 이다. 그 뒤 양대수 목사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연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는데 여기서 "양대수 게구리 미워하듯 한다."는 속담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1694년 9월에는 이익태 목사가 중건하였고 영조때에는 김정 목사가 다시 정자를 중수하고 못 가운데 석대를 쌓아서 똧과 대나무를 심고 향의실이라 개명하여 공물을 봉진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홍화각 정면 5칸, 측면 4칸, 가구는 2고주 7량구조, 공포는 외1출목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홍화각은 예전에 절제사가 사무를 보던 곳으로 홍화각이라 명명한 것은 왕의 어진 덕화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한다는 것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하며 탐라고각이라 불리엇을 정도로 관아건물중에서는 가장 웅장하였다고 한다. 홍화각 편액의 세 글자는 제주 출신의 문신으로 세종 때 한성부판윤을 역임한 고득종(高得宗)이 썼고 현재 걸려있는 편액은 탁본 하여 새긴 것이라고 한다. 원래 현판은 고양부삼성사에 보관되어 있다.

절제사 방어사 집무실

728x90

중대문
영주협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1고주 5량구조, 공포는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영주협당은 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이다.
귤림당

이원조 목사의 『귤림당중수기(橘林堂重修記)』에 의하면 “이 땅에 귤명(橘名)된 국과원(國果園)이 모두 36곳인데, 홀로 이 귤림당만이 연희각 가까이에 있다. 입추(立秋) 이후가 되면 서리가 내려서 많은 알갱이가 누렇게 익는다. 공무를 보는 여가에 지팡이를 짚고 과원을 산책하노라면 맑은 향기가 코를 찌르고, 가지에 열매 가득한 나무들을 쳐다보노라면 심신이 다 상쾌해진다. 그러나 귤림당의 그러나 창건연대는 알수 없다"고 귤림당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귤림당은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연희각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2교주 5량구조, 공포는 무출목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연희각은 목사(牧使)가 집무(執務)하던 곳으로, 상아(上衙)의 동헌(東軒), 목사의 정아(正衙) 등으로도 불리웠다. 상아라 한 것은 판관(判官)의 집무처(執務處)인 이아(二衙)와 구분해 명명(命名)된 것이다.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연희각기(延曦閣記)'에 의하면, "연희각은 예전에 기문(記文)이 없어서 건치(建置) 연월일을 상세히 알 수가 없다. 현판(懸板)도 누가 명명(命名)하고 누가 쓴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대(座臺) 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그 이름을 연희(延曦)라고 한 것은 외신(外臣)이 충성(忠誠)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精誠)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탐라지에 의하면 심연의 시가 부기되어 있고 또 이때 목사의 겸직이었던 절제사가 방어사로 바뀌는 것으로 보아 연희각도 이때 건립되었거나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목사의 겸직은 1642년(인조 20)에 다시 절제사로 바뀌었다가 1713년(숙종 39)부터 다시 방어사라 하였다. 그 뒤 이 건물은 1884년(고종 21)에 홍규 목사가 중주하였으나 1924년 여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헐리고 말았다.

망경루

망경루는 북두성을 의지하여 임금님이 있는 서울을 바라보며 그 은덕을 기리는 신지이며 중요한 제주목관아의 하나였다. 1556년(명종 11) 김수문 목사가 창건한 뒤 1668년(현종 9) 이인 목사가 개건하였고 1806년(순조 6)에는 박종주 목사가 중수하였다. 1861년(철종 12)에는 신종익 목사가 이 누대에 좌탑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오점과 김양수의 상량문이 전해 온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