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향교/경상북도

[한국의 향교 경상북도] 영덕향교

by Yeongsik_Im 2021. 6. 29.
728x90
반응형

[한국의 향교 경상북도] 영덕향교 盈德鄕校

영덕향교는 영덕읍내 화개서길 골목길에 자리하고 있었다. 포항에서 1시간 정도를 달려 영덕향교에 도착했으나 개방을 하고 있지 않있다. 혹시나 하여 유림회관에 있는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봤으나 상황상 관람을 할 수 없었다. 아쉽지만 담장 넘어로 볼 수 밖에~~~ 다음 목적지는 영해향교다.

 

영덕향교 외삼문

영덕향교의 외삼문 옆의 안내판을 읽다보니 '향교란 지방에 있는 문묘(대성전, 동재, 서재)와 이에 부속된....'이라고 적여 있는데 동재와 서재는 문묘가 아닌 명륜당에 부숙된 지금의 기숙사와 같은 곳인데 아마도 동무와 서무를 잘 못 표시한 것 같다.

영덕향교의 안내문에 따르면 영덕향교는 태종 10년(1410) 영덕읍 덕곡리에 창건하였으나 1914년 영덕 공립보통학교 신설에 의하여 향교 대성전 및 명륜당을 교실로 사용하였다. 이때문에 영덕읍 화개리 개인가옥을 구입하여 위폐를 봉안 하다가 1924년 영덕공립보통학교가 신축 이전되자 구 향교를 보수하여 위폐를 환안하여 왔다. 1940년 1군 1향교 봉안방침에 의하여 영해향교에 모시던 위폐를 영덕향교에 이안하고 영덕향교 위폐는 매안하였다고 한다. (※ 위폐도 위패를 잘못 쓴거 같다)

영덕향교 서재와 동재 유생들이 기숙을 하던 곳이다.

1950년 625전쟁으로 대성전 및 명륜당 기타 부속건물들이 전소되어 폐교 지경에 이르렀는데 1965년 향내 각 유림의 성금으로 화개리 현 위치의 고옥을 매입 대성전 및 명륜당, 동서재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 향교건물이 너무 노후하여 2007년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으로 소설 규모 향교로 대성전, 내삼문, 명륜당과 동재와 서재, 외삼문, 화장실을 신축하여 대성전에 5성과 송조2현, 신라조 2현, 고려조 2현, 조선조 14현으로 총 25위를 봉안하고 있으며, 매연 춘추 2월과 8월 상정일에 향내 유림이 모여 향사를 봉행 해오고 있다.

영덕향교 명륜당
영덕향교 명륜당
영덕향교 대성전, 대성전에는 대성전에 5성과 송조2현, 신라조 2현, 고려조 2현, 조선조 14현으로 총 25위를 봉안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영덕향교 개요] 조선시대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창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14년 향교 자리에 영덕공립보통학교를 신설하면서 향교의 대성전과 명륜당을 교실로 사용하게 되자 화개리 개인 집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1924년 영덕공립보통학교가 신축되자 군수 홍의식(洪義植) 등의 주선으로 구 향교를 보수하여 위패를 이안(移安)시켰다.

1944년 1군1향교 방침에 따라 같은 군에 있던 영해향교(寧海鄕校)를 폐쇄하고 그 위패를 영덕향교에 이안하였으며, 영덕향교의 위패는 땅에 묻었다. 그 뒤 6·25전쟁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가 1965년 전교(典校) 신수원(申壽元)과 유림의 노력으로 현재의 터를 매입, 후임 전교 박종대(朴鍾大)의 주선으로 대성전과 명륜당·동재(東齋)를 개축하여 1967년에 완공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1970년 전교 김우영(金羽英)의 주선에 따른 군비 보조와 장의(掌議) 방도원(房道源) 및 유림의 성금으로 대성전·명륜당을 개축하고 정문·서재(西齋)를 신축, 동재 수리 등 대대적인 중수작업을 1981년까지 실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해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현재 전교 1명과 장의 수명이 운영을 하고 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