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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방방곡곡/충북충남

충남 예산 예산 윤봉길의사 유적 · 윤봉길의사 기념관

by Yeongsik_Im 2022.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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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에 위치하고 있는 윤봉길의사 유적 내에는 기념관을 비롯해 어록탑, 동상, 사적비, 기념탑 등과 충의사, 광현당(생가), 저한당(성장가), 농촌부흥운동을 한 부흥원이 자리하고 있다. '매헌윤봉길의사사적지'였으나 2011년 7월 8일 고시에 의해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68년 창건하였고 1972년 사적 제229호로 지정 받았으며 윤봉길의 유품 28종 56점이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었다. 1974년에는 유물전시관을 건립하였고 1978년 충의문, 홍문 등을 세웠으며 충의사 건물을 중건하였다. 1984년 충의관 및 사적비, 2000년 윤봉길의사 어록탑, 2001년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관람시간은 하절기 09:00 ~ 18:00, 동절기 09:00 ~ 17:00 이며 관람료는 무료이다.

관람소요시간은 기념관은 1시간, 사적지 전체는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단체예약은 윤봉길의사기념관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서 전시 - 단체예약에서 원하는 일정 및 시간 확인 후 예약하기를 하고 본인 인증 및 확인을 하면 된다.

윤봉길의사기념관 문의전화 041-339-9238

윤봉길의사 어록탑

장부출가생불환 (丈夫出家生不還)

‘사내대장부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윤봉길의사 유적 경내에 2006년 6월 21일 건립된 어록탑은 기단과 중단, 상단, 구(오석) 4단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높이는 약 9m다. 병풍석 7쪽 안의 오석에는 매헌 윤봉길 의사 월진회 노래와 정신이 기록되어 있다.

매헌윤봉길의사 사적비

충의사 사당

충의사는 윤봉길의사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으로 충의문, 홍살문 등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사당의 편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이다.

충의사에서 참배하고 있는 관람객들
충의사 윤봉길의사 영정 윤봉길의사기념관 홈페이지 캡춰

윤봉길 의사께서는 1908년 6월 21일 도중도 생가에서 윤황과 김원상의 장남으로 태어나 4세에 이곳 성창가로 이사하여,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2학년때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덕산보통학교를 자퇴하고, 그 후 최병천 서당. 성주북 오치서숙에 수학하였으며, 15세에 배용순 어사와 결흔하였다. 스승 성주록은 본인의 호 梅谷의 梅 성삼문의 호 梅竹軒의 軒을 따서 梅軒으로 아호를 주었다.

1926년 무식한 청년의 묘표사건을 보고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을 한탄하며. 그 원인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고, 단결하지 못한데서 연유한다고 생각하어 농촌 계몽운동에 나섰다.​1930년경 망명 전까지 윤의사께서는 농촌 계몽운동으로는 무식을 몰아내는 운동(야학. 윤독회. 농민독본 편저, 학예회), 가난을 몰아내는 운동(두레. 수네, 나누심기, 공동구입, 공동소비. 위친계) 단결하는 운동(부흥원, 월진회, 수암체육회, 월례강연회)를 추진하였으나, 농총계몽 운동으로는 일제라는 큰 바위를 작은 망치와 끌로 쪼아내는 형국이라 한탄하여,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 (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중국 상해 임시정부를 향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 2년 후 백범 김구선생의 한인 애국단에 입단하여,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양원의 폭탄 의거를 결행하고, 동년 12월 19일 25세의 짧은 일생을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 순국하셨다. 해방후 1946년 윤의사 유해를 우리나라로 모셔와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윤봉길의사 사적지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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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사 기념관

윤봉길의사기념관은 민족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매헌 윤봉길(1908~1932)의사의 생애와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1년 건립되었으며, 2021년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되었다. 이곳에는 윤봉길의사 유품인 보물 제568-2호, 보물 제568-3호 등 보물 65점과 윤의사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여러 유물이 전시‧보관되어 있다. <사진 윤봉길의사기념관 홈페이지 캡춰>

윤봉길의사기념관은 개관 20년만에 새롭게 단장된다.

2020년 8월부터 추진한 확충사업에 따라 현재 기념관이 위치한 곳에 총사업비 55억원을 들여 2023년까지 기념관 리뉴얼, 교육관신축, 사무실 이전을 추진하게 된다.

윤봉길의사 처형을 준비하는 모습 사진

윤봉길의사 처형 이후 일본군은 "윤봉길의 시신은 화장했다."라고 신문에 보도했지만 사실은 근처 노다산 쓰레기 소각장이였던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좁은 길목에 사람들이 밟고 가도록 암매장되었다고 한다.

윤봉길의사 유해는 1946년 3월 2일 서상한 선생을 필두로 재일동포들과 일본 현지에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가나자와시 노다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발굴되었다.

윤봉길의사의 유해는 1946년 5월 15일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고 이후 부산에서 추도식을 진행한 뒤 6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여 6월 30일 용산구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백범 김구선생과 윤봉길의사 포토존

일제에 속박된 우리나라를 건져내기 위해 우리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고, 지식을 몸으로 보여준 실천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는 윤봉길 의사의 업적은 사적지를 찾아오는 관람객들에게 많은 귀감을 주고 있다.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하였는데

요즘 나이로 보면 대학생 정도인 19~25세 때에 큰일을 했다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해마다 4월 27~29일에는 윤봉길의 애국과 충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매헌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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