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방방곡곡/전북전남

김제 후장마을 정화암생가 · 장화쌀뒤주 · 정방섭처열녀광주이씨정려

by Yeongsik_Im 2023. 4. 26.
728x90
반응형

김제 벽골제에서 돌아 가는 길 국도 29호 도로변에 갈색 문화재 안내판이 눈에 들어와 차를 세우고 살펴보니  정화암 생가와 장화쌀뒤주를 안내하는 이정표였다. 좁은 시골길로 들어가다보니 후장마을이 나온다.

 

현재 김제시 장화동인 이곳은 원래 김제군 월산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월산면과 대촌면이 통합되어 월촌면이 될 때 전장·후장·가작을 병합하여 장화리가 된다. 1989년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하면서 김제시 월촌동 관할이 되었고, 1998년 교동과 월촌동을 병합함에 따라 교동월촌동 관할 법정동인 장화동이 되었다.

 

장화동은 외암 정윤교(鄭允喬)와 화암 정현섭(鄭賢燮)의 출생지로 동래정씨 집성촌이며, 김제 관내에서 가장 좋은 명당으로 꼽히고 있는 곳이다. 문화재로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1호인 장화리 쌀뒤주, 화동서원(華東書院)이 있다. 토끼재, 황청이, 부처댕이, 웃굴, 죽안, 화동원, 열녀문, 광배미, 강까배미 등의 옛 지명이 남아 있다.

정화암 생가 장화쌀뒤주 이정표

도로변에는 이정표가 있으나 마을로 들어오니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정화암 생가와 장화쌀뒤주로 가는 골목 입구에 위치 안내 표시를 하나 정도는 설치하면 좋을 듯 하다. 먼저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정화암생가를 소개한다. 

정화암생가

정화암 생가

이 곳은 3 • 1 운동에 참여하고 국외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정화암 선생의 생가이다. 
1896년 김제에서 출생한 선생은 1919년 3 • 1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 미국 의회 사절단이 내한했을 때. 일본의 침략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 경찰의 추격을 받아 1921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였다.망명 이후 이회영, 신채호 등과 교류하며 무력투쟁을 통한 광복 쟁취를 위해 폭탄 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 방안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1928년 재중국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1931년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 공사관에 폭탄 투척 등 무력 항쟁을 지속하였다. 1933년 이강훈. 백정기 등과 함께 상해해방연맹을 결성하고, 1936년 남화연맹의 기관지인 남화통신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여 1940년부터 상해 방면에서 활동하며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 미 • 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하여 보고하는 등 정화 활동에 기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2013년 선생의 생가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장화암 생가 안내문>

독립운동 현충시설인 정화암 생가는&nbsp; 4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방 3개와 부엌으로 되어 있고 현재는 정화암선생기념사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728x90

장화쌀뒤주

1876년 4월 2일 전라북도 만속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장화쌀뒤주는 전북 김제시 장화동 210-1번지 정종수고택에 있는 쌀을 담기 위한 대형 뒤주이다.

장화쌀뒤주

보통의 뒤주가 통나무나 널빤지를 짜서 궤짝의 형태로 만드는데 비해, 이 뒤주는 크고 외형도 독특하다. 크기는 너비 2.1m, 높이 1.8m로, 널빤지를 짜 맞추어 벽체를 구성하고 볏짚으로 지붕처럼 뚜껑을 만들어 씌웠다.

이 고장 출신인 정준섭은 당시의 큰 부자로, 이 집을 찾는 사람들이 매일 수백 명에 이르자 작은 궤짝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결국 안마당에 이러한 초대형 쌀뒤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1864년(고종 1) 정준섭(鄭峻燮)이 제작하였고, 현재는 정종수(鄭鍾洙)가 소유하고 있다.

조선 고종초에 제작된 이 뒤주는 가로와 세로는 각각 210㎝로 정방형이며, 높이는 180㎝이고, 판재의 두께는 3.3㎝이다. 가득 채울 경우 70가마 정도의 분량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크고 독특한 건조물로서, 집을 찾는 사람들을 소홀하게 대접하지 않았던 당시의 훈훈한 인심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민속자료이다.

현재의 정종수고택의 구성은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사랑채와 곳간이 있고, 안쪽에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쌀뒤주는 예전에 곳간 옆에 있었지만, 현재는 안채를 바라보면서 전면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 

정방섭 처 광주이씨 정려

정종수고택 앞에 효열각이 세워져 있어 잠시 살펴 보았다.

이 효열각은 정방섭 처 열녀 광주이씨 정려(鄭邦燮妻廣州李氏旌閭)이다. 정방섭 처 열녀 광주이씨 정려를 받은 연대는 1889년(고종 26) 3월로 도백 이헌식이 임금께 아뢰어 특명으로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각은 동래정씨 효열각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의 팔작기와지붕집이다. 목조 기와집으로 밑기둥은 돌기둥이며, 새로 지어 단청이 잘되어 있고 정화비까지 세워져 있다. 팔각형의 돌기둥을 4개 세우고 공포와 창방을 올렸으며, 망새기와와 겹처마가 품격을 나타내고 있다.

효열각 안에는 편액이 3개 걸려 있는데, ‘효자증통정대부사헌부지평정지형지려(孝子贈通政大夫司憲府持平鄭志亨之閭)’, ‘열녀성균진사정환석지처의인김제조씨지려(烈女成均進士鄭桓奭之妻宜人金堤趙氏之閭)’, ‘열녀통덕랑정방섭지처공인광주이씨지려(烈女通德郞鄭邦燮之妻恭人廣州李氏之閭)’가 그것이다. 정려각 앞에는 ‘시은거사정공재수가적비(市隱居士鄭公在洙嘉蹟碑)’가 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정지형(鄭志亨)의 증손자며느리로 통덕랑 정방섭(鄭邦燮)의 아내이다. 광주이씨는 시어머니가 병으로 몸져눕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올리는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또한 남편이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자 축대를 쌓아 단을 만들고 그곳에서 8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늘에게 빌었으며, 열 번이나 손가락을 찢고 세 번 허벅다리 살을 베어 남편을 낫게 하고자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보람도 없이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광주이씨도 조용히 목숨을 끊어 그 뒤를 따르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관찰사 이헌식이 임금한테 아뢰어 특별히 정문(旌門)을 내렸다.

효열각보수정화기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