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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방방곡곡/전북전남

금환락지 명당터 구례 운조루 고택

by Yeongsik_Im 2022.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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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민속문화재 제8호 구례 운조루 雲鳥樓 Unjoru House, Gurye

 

3월 29일 하동으로 가며 19번 국도를 지나다 구례의 명품고택인 곡전재와 운조루를 방문했다. 그러나 운조루는 아쉽게도 안채 금회보수 공사중이서 모두 돌아볼 수는 없었다. 운조루는 입장료 1,000원을 받고 있었다.

구례 운조루는 1968년 국가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된 원형이 잘 남아있는 조선후기의 상류주택이다.

운조루는 고택의 누마루가 있는 사랑채의 이름으로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사는 집' 또는 '구름 위를 나는 새도 돌아오는 집'이라는 뜻이다.

중국 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지로 돌아오네

에서 첫머리인 운(雲 ) 자와 조( 烏 ) 자를 따온 것이라고 한다.

운조루 대문 앞으로는 마당은 없고 바로 긴 연못이 가로 놓여 있다. 연지에는 섬이 하나 있다. 이는 삼신산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한다.조선시대 상류층의 조경관이었던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짐)을 표현한 것이다.주변으로 각종 연화(蓮花)를 비롯한 화초를 심었다. 원래는 약 200평 되던 것이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연당은 맞은편에 보이는 오봉산(五峰山) 삼태봉(三台峰)이 화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전한다.
운조루홈페이지

운조루 입구 대문간을 중심으로 서행랑채와 동행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사진의 좌측으로 보이는 건물이 큰사랑채인 운조루이고 우측 건물은 귀래정이다.

구례 운조루 고택은 영조 52년(1776)에 낙안군수를 지낸 류이주가 지은 것으로, 조선 시대의 양반 가옥의 대표 건물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집터가 금환락지(金環落地 금가락지가 떨어진 땅) 형세로 남한 3대 길지의 하나라고 한다. 집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와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전라도 지역에서는 ‘一’자형이나 ‘ㄱ’자 형 안채가 많은데, 이와 달리 운조루 고택은 ‘ㄷ’ 자 형의 안채와 ‘丁’ 자형 사랑채를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트인 ‘ㅁ’ 자 형식이다. 이 형식은 경상북도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운조루를 세우기 시작한 해는 1771년으로 유이주가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고 살았던 집의 형식으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운조루는 7년이라는 긴 공사 기간을 거쳐 1776년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의 초기 모습은 180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전라 구례 오미동 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 )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운조루 안내문

중간사랑채 귀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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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재 처마
서쪽의 누마루는 족한정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데 한가롭게 머문다는 의미이다.
운조루 마루에서 차를 한잔 마시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읋까?
누마루 추녀에 중수기록이 남아있다.
서행랑채 창문

 

운조루의 유물

구례 운조루의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볼 수 있는 운조루 유물전시관은 2016년 4월 19일 개관했다. 운조루에 소장되어 온 유물들이 여러 차례 도난을 당하면서 유물의 체계적인 보존, 관리를 위해 운조루 유물전시관을 개관하게 됐다고 한다.

운조루 유물전시관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100년 동안 쓴 생활일기부터 운조루 현판, 생활민속품 등 운조루의 삶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전라구례오미동가도 운조루 소장. 사진인화본 접사.<사진 운조루 홈페이지>

전라구례오미동가도 운조루 소장. 사진인화본 접사. 1800년대에 그려진 운조루의 최초 모습에 가장 근벚한 자료라 한다.

채 명칭은 재산분재기인 '장자구처기(1793년)'에 의한 것이다. 표기상으로는 78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85칸 또는 100여칸에 육박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는 63칸이 보존되어 있다.<사진 운조루 홈페이지>

운조루 뒤주

운조루에는 유명한 뒤주가 하나 있다.이 뒤주에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그 문구가 바로 '他人能解'이다.타인능해, 즉 "누구나 쌀 뒤주를 열 수 있다."원통형의 이 뒤주에는 세 가마니의 쌀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마을의 굶주리는 모든 이를 위해 이 뒤주는 항상 개방되어 있었다.창건주 류이주님은 한 달에 한번씩 뒤주가 비워지면 쌀을 다시 채울 것을 명했다고 한다. 운조루는 대략 이백여 석의 쌀을 소출했는데 어떤 시기에는 전체 소출량의 20%를 베풀기도 했다고 한다.대개는 매년 삼십여 가마의 쌀을 양식 없는 이웃들을 위해 내어 놓았다고 한다.​쌀을 얻기 위해 운조루를 방문하는 일은 즐거운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혹여 다른 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뒤주는 중간사랑채와 큰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헛칸에 두었다. 주인들과 쉽게 마주칠 가능성이 낮은 곳에 뒤주를 두고 쌀을 가져가는 사람들의 불편한 마음을 헤아린 것이다.마을 사람들은 가능하면 이 뒤주의 사용을 자제했던 모양이다.자기보다 더 힘든 이웃들을 위해 운조루의 뒤주를 양보했다.오히려 근면하게 노동해서 난관을 헤쳐 나가는 자극제이기도 했다.결국 뒤주를 개방한 운조루의 마음과 뒤주를 여는 일을 자제했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동일한 것이었다.​동학, 여순사건, 6.25 전쟁 등 이 아름다운 마을은 지리산이라는 '큰 산 아래에 산 죄'를 수도 없이 치루었다. 그 힘든 시간을 관통하면서도 운조루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바로 이 타인능해(他人能解)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비결은 상생이었다.
운조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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