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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방방곡곡/서울경기

서울 문묘와 성균관

by Yeongsik_Im 2022.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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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을 말하며, 성균관은 나라의 인재를 길러내는 조선시대의 으뜸가는 교육기관이다.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1398년(태조 7)에 처음 세워졌으나 화재와 전쟁으로 여러 번 고쳐 지었고, 1869년(고종 6)에 크게 수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와 서무를 포함하는 제사 공간이 앞쪽에 명륜당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를 뒤쪽에 두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방식으로 대표적인 곳이다.

대부분 평지에 건립된 전주향교와 경주향교 등이 전묘후학의 배치방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전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성전은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孔子)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전각(殿閣)을 말한다. 공자를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자(子思子)·맹자(孟子)등 4성(四聖)을 좌우에 배향(配享)하고, 공자의 제자 10철(十哲)·송조 6현(宋朝六賢)의 위패 그리고, 우리나라 신라의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하여 모두 18현(十八賢)을 종향(從享)하였다.

대성전 현판은 조선중기의 명필 석봉(石峰) 한호(韓濩)의 글씨다.
신삼문
대성전과 동서무
묘정비각 (廟庭碑閣 )

묘정비각은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비석으로 태종 때 변계량(卞季良)이 비문을 작성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때 새로 각석하고 당시의 문장가인 이정구(李廷龜)가 비음(碑陰)을 지어 복원하였다.

서무

서무 (西廡)는태조 7년(1398) 대성전과 동시에 창건하여 공문(孔門) 제자69분의 위패를 포함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 112분의 위패를 동·서로 봉안하였다가 해방후 전국 유림대회의 결정으로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모시고 그 밖의 94현의 위패는 매안(埋安:위패를 땅에 묻음)하여 지금은 비어 있다.

대성전 우측이 동무이고 동무 앞쪽이 묘정비각이다.
동무

동무 (東廡)는 태조 7년(1398) 대성전과 동시에 창건하여 공문(孔門) 제자69분의 위패를 포함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 112분의 위패를 동·서로 봉안하였다가 해방후 전국 유림대회의 결정으로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모시고 그 밖의 94현의 위패는 매안(埋安:위패를 땅에 묻음)하여 지금은 비어 있다.

대성전 측면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는 영역이 성균관의 교육 공간으로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성균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각 향교에 설치되어 있다. 1398년(태조 7)에 설립되어 왕세자까지 교육한 조선시대의 최고 학부였으며 때때로 과거 시험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성균관 명륜당 (成均館 明倫堂)

명륜당은 총 18칸으로 좌·우에 협실이 있고 중간에 당(堂)이 있는 구조로 3동을 하나로 연결해 지었다. 가운데 건물은 마루로 되어 있고, 그 양쪽 날개채에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있는 온돌방이 있다.

이곳은 진사(進士)와 생원(生員) 중에서 엄중 선발하여,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정신과 인격을 연마하여 국가발전을 위한 지도자의 덕목을 익혀나가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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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明倫)’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며 현판 글씨는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審)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박문약례 현판과 덕화만방 현판

박문약례(博文約禮 )는 지식은 넓게 가지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는 공자의 말이고, 덕화만방(德化萬方)은 덕행으로 감화하여 인재 양성이 세상에 두루 미치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동재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학생들의 기숙사로서 20칸의 긴 건물에 앞뒤로 툇마루를 설치한 독특한 형식이다. 약방과 학생의 대표인 장의방이 따로 있었다.

성균관대학교가 생긴 이후에도 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기숙하며 전통의 맥을 잇고 있었으나 몇년전부터 문화재 보호의 목적으로 퇴거하였다.

동·서 양재(兩齋)를 일명 성균관(成均館)이라고도 한다.

서재
동재에 걸려 있는 북

성균관에서는 북을 쳐서 유생들에게 시간을 알렸는데, 북을 한 번 치면 침상에서 일어나고, 두 번 치면 의관을 정제하고 글을 읽으며, 세 번 치면 진사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59호 은행나무

명륜당 앞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는 1519년(중종 14)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를 따른 것이라 한다.

명륜당 주변 배치도
존경각과 육일각

존경각(尊經閣)은 대학 도서관의 효시로 성종 때 한명회의 건의로 건립되었다.

육일각 (六一閣)은 영조때 명륜당 북쪽, 향관청 서쪽에 건립되었으며 나중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육예(六藝)인 예(禮), 악(樂), 사(射), 어(御),서(書), 수(數) 가운데 하나 인 사례(射禮)의 기구인 활과 살을 보관하는 곳이었으므로 육일각이라 명명하였다.

제기고와 전사청 협문
성균관 대학당(戴學堂)

대학당(戴學堂)은 문묘(文廟)를 관리하던 담당자가 거처하던 곳으로 일명 수복청이라 한다.

대성전 서쪽 담장 밖에 남향 4칸으로 건조되었다.

제기고(祭器庫)

제기를 보관하던 장소로 대성전 서쪽에 위치하며 6칸 규모의 건물이다.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대성전 서쪽에 6칸 규모로 지어진 건물로 석전 때 제찬을 준비하는 곳이다.

향관청 (享官廳)

향관청 (享官廳)은 석전에 사용할 향축(香祝)을 봉안(奉安)하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효종때 재건하 였다.부속 건물로 건물 앞 동서쪽에 동월랑(東月廊)·서월랑(西月廊)이 있다.

향관청과 서월랑
동월랑
정록청 (正錄廳)

정록청은 명륜당 동쪽에 8칸 규모로 지어진 성균관 관원의 사무실로 과거 응시자들의 예비심사 및 시정(時政)을 적어 보관하기도 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러한 기능은 폐지되고 관내의서무를 전담하는 기구로 축소되었다.

진사식당

진사식당은 성균관 유생들의 전용 식당이다. 총 33칸 규모의 건물로서 칸을 막지 않고 길게 터서 수 백 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든 독특한 구조이다. 성균관에서는 북을 쳐서 유생들에게 시간을 알렸는데, 북을 한 번 치면 침상에서 일어나고, 두 번 치면 의관을 정제하고 글을 읽으며, 세 번 치면 진사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였다. 아침, 저녁 두 끼 식사를 할 때 마다 원점을 하나 씩 찍어주었는데 이는 유생들의 출석을 점검하는 역할을 하였다.

좌측이 진사식당 우측은 동재이다.
동재 마루와 출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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