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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방방곡곡/충북충남

공주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by Yeongsik_Im 2022.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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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송산리고분군 도로 건너편 공주종합운동장 광장에는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이 우뚝 세워져 있다.

이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은 공주시 '기미년 3.1 독립만세운동기념 사업회(회장.지상준)'가 선열들의 자랑스런 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4년 3월 1일 공주시 웅진동 공주종합운동장 광장에 주민들이 흔드는 태극기 물결속에 제막됐다.

공주 기미년3·1독립만세운동기념탑

기념탑 앞 좌측의 기념탑 건립기에는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다.

1919년 3월 1일 정오 2천만 겨례의 함성은 신분과 계층 지역과 종교를 초월하여 삼천리 금수강산을 뒤흔들었고 세계만방에 우리 민족의 기계를 떨폈다.그때 우리 고장 공주는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로서 일제의 감시가 삼엄하여 만세운동이 매우 어려웠음에도 이 지역을 대표하여 서덕순 유준석 윤봉균 김상진 노명우 선생 등이 3월 1일 서울 파고다(탑골)공원 독립선언 선포식에 참가하였고 공주에서는 한 달 뒤인 4월 1일 공주 장날을 기하여 일제히 만세운동을 일으켰다.당시 만세운동은 영명학교 김관회 김수철 이규상 선생이 주도하고 영명학교장 윌리엄 선교사와 현석칠 안창호 목사의 후원아래 영명학교와 농업학교 남여학생 일본 동경과 서울 유학생 시민 수백여 묭이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특히 영명학교 학생으로 양재순 노명우 윤봉균 강윤과 유관순 열사의 친오빠 유관옥 4촌오빠 유준석도 학생신분으로 먼세운동에 동참하였다.이에 주동자인 양명학교 선생과 학생 교외목사와 일반인 수백명이 태형과 옥고를 당하였으며 일부 인사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였다.이 만세운동은 점차 확산되어 정안 석송리 이병림의사가 흉탄에 쓰러지고 이기한 등 25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유구 탄천 계룡 장기 의당 유성 등 모든 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개되었다.이러한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오늘날 우리 세대의 화합으로 승황시키는 한편 자라나는 후손들로 하여금 강물처럼 흐르는 애국심을 함향하기 위하여 기념탑을 세우고 이를 영원히 기린다. 2004년 3월 1일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
기념탑건립기

공주지역 만세운동은 기미년 3~4월에 걸쳐 총 16회에 이르는 12개면에서 연인원 1만여 명이 참여한 대중 운동이었다.
공주 기미년3·1독립만세운동기념탑 후면
민족의 자존 / 함성 기념탑 글씨 이화영 조각 변숙경
공주종합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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