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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 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 에밀레종

by Yeongsik_Im 2023.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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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일 방문하여 21일에 블로그에 소개한 경주여행의 필수코스 국립경주박물관에 이어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과 함께 옥외전시장을 소개한다.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월정교와 경주향교를 찾아 가는 길 국립경주박물관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시 일정로 186에 위치한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의 문화유산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는한

hyanggyo.tistory.com

국립경주박물관 뜰에는 범종, 석탑, 석불, 석등, 비석받침, 전각 기단 부재 등의 석조품 1,3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경주와 그 주변지역의 옛 절터나 궁궐터, 성터 등에서 옮겨 온 것들로 대표적인 전시품으로는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빼어난 종으로 평가되는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을 비롯하여 감은사 터 동·서 삼층석탑과 쌍벽을 이루는 통일신라 초기의 고선사 터 삼층석탑(국보 제38호), 8세기 통일신라 불교조각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장항리 절터 석조불입상, 낭산 출토 석조관음보살입상 등을 들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입구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역사관, 어린이박물관, 특별전시관, 신라미술관, 월자관, 신라천년보고, 신라찬년서고, 수목당과 고청지를 비롯하여 이어서 소개하는 성덕여왕신종 종각, 옥외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먼저 국립경주박물관의 옥외전시를 살펴 보았다.

국립경주박물관을 들어서면 먼저 성덕여왕신종 앞쪽에 전시되어 있는 숭복사터 쌍거북 비석받침과 통일신라 8세기 후반~10세기 초 석탑 몸돌에 새겨진 부처들을 만나볼 수 있다.

 

숭복사터 쌍거북 비석받침

숭복사터 쌍거북 비석받침

 

두 마리 거북이 붙어 있는 이 비석받침은 경주 외동읍 말방리 숭복사터에 있던 것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원성왕(재위 785-798)의 능은 토함산 서쪽 골짜기 곡사(숭복사)에 있으며 최치원(857~)이 지은 비문이 었다.'는 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써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이라는 것과 이 비석받침 위에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쌍거북 비석받침은 어디에 또 있을까요? 숭복사 외에도 경주 배리에 었는 창림사터와 경주 암곡동의 무장사 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그렇다면,왜 다른 비석과 달리 쌍거복 받침일까요?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세 절 모두 선라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입니다.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북을 빌기 위한 절이고, 창림사 일대는 박혁거세(재위 57BCE~4CE) 가 세운 신라 최초의 궁궐터라고 알려져 있으며, 무장사는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를 숨겼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입니다. 아마도신라 사람들은 왕실과 관련된 비석을 좀 더 화려하게 꾸미고 싶지 않았을까요?
숭복사터 쌍거북 비석받침 안내문

 

석탑 몸돌에 새겨진 부처

통일신라 8세기 후반~10세기 초 석탑 몸돌에 새겨진 부처

 

통일신라 후기에는 석탑의 표면에 부처(佛), 보살(菩薩), 신중(神衆)을 비롯하여 다양한 상들이 새겨졌다. 이 조각상들은 석탑의 내부에 모셔진 불사리(佛舍利)를 받들거나 장엄하여 예배대상으로서 탑의 성격을 강조하는 역할율 한다. 그 중에서도 석탑의 1층 몸돌 네 면에 새겨지는 불상인 사방불(四方佛)은 온 세상에 부처님이 계시고 그 가르침이 사방으로 퍼져간다는 불교의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다. 통일신라 석탑 사방불은

좌상뿐만 아니라 서 있는 입상으로도 표현되었고, 동쪽 면에는 약사불이, 서쪽 면에는 아미타불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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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입실리 절 터 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

 

경주경찰서에서 보관하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본래 5층으로 된 동·서 쌍탑의 1층 몸돌이었었는데 형태가 온전한 왼쪽은 동탑, 한쪽면이 결실된 오른쪽은 서탑의 것이다. 두 몸돌의 네 면에는 각각 부처가 한 구씩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약그릇으로 보이는 둥근 물건을 손에 든 부처는 동방유리광정토의 약사여래로 추정된다. 이처럼 서 있는 자세의 부처를 부조로 새긴 것은 경주 지역 석탑의 특징이다.

 

석탑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

 

석탑의 1층 몸돌로 보이는 이 부재(部材)에는 불교에서 가방을 수호하고 불법을 지키는 하늘의 신 사천왕이 네 면에 새겨져 있다. 이 두 기의 석탑 몰돌은 크기와 상(像)의 조각수법이 서로 비슷하여 쌍탑이엇을 가능성이 크다.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악귀를 밟고 서 있는 위협적인 모습을 하고 잇으며, 마치 살아잇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통일신라 조각에서 사천왕상은 대개 손에 보탑(寶塔)을 든 다문천(多聞天)이 북쪽이 되기 때문에 그 나머지 세면의 방위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성덕대왕신종 에밀레종 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 종각

 

성덕대왕신종 (聖德大王神鐘)은 원래 성덕대왕(재위702~737)의 원찰(왕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찰)이었던 봉덕사(奉德寺)에 있다가 이 절이 폐허가 되면서 영묘사(靈廟寺,경주읍성 남문 밖,동부동 옛 국립경주박물관을 거쳐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우리에게는 ‘에밀레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만들때 어린 아이률 집어넣어 만들었는데,종올 칠 때 나는 소리가 마치 아이가 그 어미를 부르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신라의 전설이 망라되어 있는 조선 후기 읍지인 『동경잡기 東京雜記』 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아마 1920년대 종을 보다 신비롭게 보이도록 지어진 이야기로 생각된다.

성덕대왕신종 안내문에는 아래와 같이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과연 종을 만들 때 어린아이를 집어 넣었을까요? 살생을 금지하여 벌레조차도 죽이지 않는 불교률 믿는
사람들이 어린아이률 집어넣어, 중생올 구제한다는 범종을 만들었율까요?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펼친 결과,사람 뼈를 이루는 성분인
'인(P)’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종입니다. 특히 아름다운 종의 형태와
무늬,심금율 울리는 종소리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습니다.
종 한 가운데 손잡이 달린 향로를 받쳐 들고 있는 비천의 모습은
성덕대왕의 극락왕생율 간절히 염원하는 듯 하지 않나요?

 

성덕대왕신종에 새겨진 글은 무슨 내용일까?

성덕대왕신종에는 두 군데에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 면(현재 등면)에는 성덕대왕신종을 만들게 되기까지의 기록인 산문이 있고, 그 반대면(현재 서면)에는 네 글자씩 50줄로 된 운문과 글을 짓고 쓴 사람, 종을 만든 사람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산문은 "성덕대왕신종지명 聖德大王神鐘之銘” 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종의 이름이 성덕대왕신종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갈습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이 선대왕인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구리 12만 근으로 큰 종을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숭하(昇遐)하자, 경덕왕의 아들 해공왕(재위 765~780)이 즉위 7년만인 대력(중국 당나라 대종의 연호) 6년(771) 신해년 12월 14일에 종을 완성하였다고 합니다.운문온 우선 삼국을 아우른 신라를 예찬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나라 구석까지 성스러운 교화를 펴 모든 것이 새롭게 뻗어나가게 하고,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질서를 기반으로 만대의 번영을 누리자는 각오와 다짐을 적고 있습니다.
성덕대왕신종안내문 - 성덕대왕신종에 새겨진 글은 무슨 내용일까?

성덕대왕신종 산문

 

옥외전시장

옥외전시장 석가탑 복제품
석가모니부처 앞에 나타난 칠보탑, 다보탑 복제품

 

토함산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 동쪽에 있는 다보탑을 그대로 만든 것으로, 1975년에 이곳으로 박물관을 옮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다보탑의 정식이름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으로, 법화경 견보탑품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탑이다. 다보탑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볼의 설법을 증명하기 위해 땅에서 솟아난 다보불의 상징인 칠보탑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이 다보탑 복제품은 불국사에 있는 진품과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사자외 숫자와 방향이다. 불국사 다보탑에는 사자 한 마리가 기단 서쪽 정중앙에 앉아있지만, 여기의 복제품에는사자 네 마리가 귀퉁이에 앉아 있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이와 같이 네 마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세 마리가 없어지고 현재 한마리만 남게 된 것이다. 분황사 석탑이나 화엄사 사사자석탑등에 있는 사자 네 마리가 모두 네 퀴퉁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탑도 네 귀통이에서 불법을 수호하라는 의미로 사자를 배치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수목당 고청지 사진 국립경주박물관 홈페이지

전통 한옥 건물로 지어진 수묵당(樹墨堂)과, 그윽한 정취를 풍기는 연못인 고청지(古靑池)는 2007년부터 우리 박물관의 교육과 행사 장소로 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수묵당과 고청지라는 이름은 수묵(樹墨) 진홍섭 선생(1918~2010)과 고청(古靑) 윤경렬 선생(1916~1999)을 기리기 위해 두 분의 호를 따서 지은 것입니다. 진홍섭 선생은 1952년부터 1961년까지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신인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의 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이고, 윤경렬 선생은 평생 동안 경주와 신라 문화를 사랑하고 가꾸었던 자랑스러운 경주인이었습니다. 이 두 분은 1954년부터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를 만들어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으며,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묵당과 고청지에는 우리나라 박물관 교육의 선구자였던 이 두 분의 높고 아름다운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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