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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현숙 효열비 · 벽골제탑 · 청해진 유민 벽골군 이주 기념탑

by Yeongsik_Im 2023.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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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표축제인 지평선축제가 열리는 전라북도 대표 관광지 김제 벽골제를 돌아보고 인근에 있는 아리랑문학관과 아리랑문학관 잔디마당에 세워져 있는 현숙효열비 · 벽골제탑 · 청해진유민벽골군이주기념탑을 돌아 보았다.

만경강과 동진강에 둘러싸여 노령산맥 서쪽에 위치한 김제시는 만경평야와 김제평야 등의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여 호남평야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는 농경문화의 중심지로 이와 관련한 유적으로 사적 제111호 김제벽골제가 있는 곳이다. 벽골제는 이어서 소개한다.

현숙 효열비

효녀 가수라 불리우는 현숙은 효행이 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어 예로부터 효(孝)를 중시하는 김제시에서는 각계각층의 정성을 모여 국내 연예인 제1호 '현숙효열비'를 건립했다. 현숙효열비는 2010년 제12회 김제지평선축제가 개막하는 10월 6일, 벽골제 아리랑문학관 창작스튜디오 내 특설무대에서 제막식을 실시했다.

현숙효열비

가수 현숙은 해마다 고향인 김제를 찾아 어려운 이웃과 함께 쌀을 나누고 김제사랑장학재단 장학금을 기부하는 등 남다른 사랑과 애정을 보였으며 특히 고장의 유산인 효의 정신을 실천해 2007년 전북애향대상과 김제시민의장 효열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숙은 중풍과 치매를 앓던 아버지를 7년간 극진히 보살피고 의식이 분명치 않은 어머니를 14년간 지극정성으로 모신 공로로 1996년 효행 연예인으로서 국민포장, 2001년 효령대상 효행부문상, 2009년 제33회 삼성효행상 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또 2004년부터 전북 김제, 경북 울릉도, 경남 하동, 충남 청양, 전남 장흥 등지에 이동목욕차량을 꾸준히 기증, 혼자서 목욕을 할 수 없거나 목욕탕을 갈 수 없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활용하도록 하고 있어 지역사회에 귀감이 되고 있다.

2022년 12월 7일 김제출신 효녀가수 현숙이 장학금 3000만원을 김제시장학재단에 기탁한후 정성주 시장 등과 함께 현숙 효열비앞에서 기념촬영했다. 사진 김제시
현숙효열비 좌측에 새겨진 홍보대사 및 이동목욕차량 기증 현황
현숙효열비 우측에는 MBC 10대 가수상 3년 연속 수상 등 수상경력이 새져져 있다.

현숙효열비 뒤쪽으로는 가수 설운도가 작사·작곡하고 현숙이 부른 "나의 어머니'가 새겨진 비석과 그 옆에는 현숙효열비 건립경위가 세워져 있다. 효열비 뒷면에는 현숙효열비 건립에 도움을 주신 분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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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숙 효열비 기념식수 뒤쪽으로 벽골제창작스튜디오가 보인다.

벽골제 탑

벽골제탑은 김제지평선축제의 5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축제 선정 및 글로벌 육성 축제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2018년 6월 21일 아리랑문학관 잔디마당에 세워졌다. 벽골제탑 건립에는 김제 죽산면 출신의 김수철 (주)지산실업 회장이 2억원을 기부했다.

국가사적 제111호 김제 벽골제는 면적 9840경 95부(약 1만ha,3천만평)의 농수원이었습니다. 벼고을인 이곳에 둑을 쌓으면 흉년이 없다는 선인들의 혜안으로 일궈낸 성지입니다. 청룡 백룡의 용맹, 단야낭자의 헌신적 사랑 설화 속에 모악산 상두산에서 흐르는 물 모아, 벼 한 포기, 쌀 한톨한톨의 자양분이 되게 하엿습니다. 이 생명수와 수리 도작인들의 지혜가 김제 만경의 황금들녘을 만들어 냈고 농자천하지대본의 표본을 이뤄냈습니다. 그 역사, 뜻 깊어 김제지평선축제로 승화된 뒤 해마다 승승장구하더니 마침내 우리나라 처음으로 5회 연속 대한민국 대표축제, 글로벌 육성축제로 큰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를 영원토록 기리고 빛내고자 소설 아리랑의 배경인 죽산 출향인으로서 자랑스런 마음으로 이 탑을 세웁니다. 벽골제 탑문

벽골제탑

청해진 유민 벽골군 이주 기념탑

청해진(淸海績)은 828년(통일신라 흥덕왕) 지금의 완도에 설치되었던 해군 무역기지로서 장보고가 당나라 무령군 소장들 역임할 무렵 중국 사람들이 신라 변방 사람들을 노비로 삼는 것을 보고 귀국한 후 설치한 것이다.

 

이후 장보고는 청해진을 근거지로 해적들 소탕하고, 동중국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등 당과 신라, 그리고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 하였다. 이에 국왕을 대신하여 백성들의 우상이 되어버린 장보고와 청해진 세력은 중앙정부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였고, 중앙에서는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들 보내어 암살케 하였다. ’삼국사기’ 문성왕편의 기록을 보자면 841 년(문성왕 3년) 장보고가 죽고 염장이 청해진들 운영하는 동안 당과의 교역은 축소되었으며 또 다른 반란세력으로 대두될 수 있다는 판단으로 851년(문성왕 13년)에 청해진 및 인근 주민 약 10만 여명을 지금의 김제 땅인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켰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이주민들은 벽골제 보수공사 및 동진강 유역의 간척, 방수공사에 투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한·중·일 해상권을 주름잡던 청해진 유민의 위엄과, 해상왕국의 기상이 오늘날 풍요로운 김제 땅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청해진 유민 벽골군 이주 기념탑 안내문 참조>

청해진 유민 벽골군 이주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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