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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우리나라 최대의 고대저수지

by Yeongsik_Im 2023.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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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21일에는 전라북도 김제지역을 여행했 다. 김제시 만경읍의 만경향교와 만경읍의 향토문화유산을 살펴보았고 전라북도 대표 관광지인 벽골제도 돌아보았다. 벽골제 관광지는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1호로 지정된 벽골제와 벽골제관광지, 농경문화박물관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김제 벽골제(이하 벽골제)는 전라북도 김제시 동쪽 모악산에서 서해로 평쳐진 충적평야 병목에 남북방향으로 설치된 토제(土製)제방으로 모악산을 수원으로 벽골제를 통해 서부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다.

문헌에 따르면 벽골제는 330년 삼국시대 축조되어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수축 되는 등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유지 관리되었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현재 약 2.5km의 현존 제방과 수문, 중수비가 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벽골제는 김제 만경평야 일원에 1,700년간 자리하며 대한민국 고대 수리시설 및 농업유산의 가치를 대표하고 있다.

벽골제 장생거

1530년 발간된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벽골제에는 5개의 수문이 있었는데 그 명칭이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라 하였다고 한다. 그 중 장생거와 경장거는 1975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1980년에 수문에 대한 복원공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장생거의 수량을 조절하는 수문의 양쪽 기둥석은 5m 정도 높이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

2023년에는 유통거 수문의 발굴조사가 에정되어 있다.

수문은 벽골제 수리기록으로 보아 1415년(태종 15) 이전부터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 수리시설에서 자주 사용하는 갑문구조와 같은 방식으로 수문을 통해 주변 농경지에 물을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1975년 벽골제 장생거 및 경장거 발굴조사 모습
장생거 모형
벽골제 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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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 제방은 높이 3.5~4.0m, 길이 2.5km에 이른다.
벽골제 제방
벽골제 안내문
벽골제 제방으로 오르는 계단

벽골제중수비

벽골제 앞에는 1980년 옮겨온 벽골제 중수비가 있는데 사적 제111호 김제 벽골제의 지정 내용에는 현존 제방 약 2.51매와 더불어 1415년 중수를 기념하는 벽골제 중수비가 포함하고 있다.

벽골제 중수비는 1415년조선 태종 15 당시 수군도만호였던 김제사람 박초가 썼으며, 중수비의 비문은 1530년 발간된 〈신중동국여지승람>에 전문이 전해진다.

중수비 내용은 벽골제와 김제군명의 연원, 고적에 기록된 벽골제의 규모와 관개유역, 태종의 치수의지, 각급 공사주체와 인력규모, 공사의 난이점, 제방 제원의 세부 및 완공시기가 정리되어 있다.

중수비의 원래 위치는 신털미산 정상부이나 1980년 유적을 정비하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벽골제 중수비 앞면
벽골제 중수비 뒷면

벽골제 관광지 안에 있는 농경문화박물관에는 중수비각이 보호시설이므로 관람객들이 중수비를 관람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벽골제 중수축의 이해를 돕기 위해 디지털스캐닝을 거쳐 재현한 중수비가 전시되어 있다.

김제 벽골제 문화재 전경과 중수비 위치도
김제벽골제비

조선 세종 15년(1433)에 벽골제의 둑을 보수한 기념으로 세운 비인 '김제벽골제비'에는 벽골제 시공 개요가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다.

김제읍에서 남으로 15리쯤 되는 곳에 큰 방죽이 있는데 이곳을 벽골제라 한다. 김제의 옛 이름이 벽골이므로 그에 따라 명칭을 붙인 것이요. 현재 군의 명칭도 이방죽으로 인하여 고쳐진 것이다. 과거의 기록에 의하면 방죽의 길이는 60,843척이요 방죽 안의 둘레가 77,406보다. 5개소의 도랑을 만들어서 물을 대는 논은 모두 9,840결 95짐이라 하였다.

첫째가 수여 도랑 하천 하나를 넘어서 만경현 남쪽까지 흐른다.

둘째는 장생 도랑 개천 두 곳을 넘어서 만경현 서쪽 부륜강의 근원으로 흐른다.

세째는 중심도랑 하천 하나를 넘어서 고부의 북쪽과 부령의 동쪽지역으로 흐른다. \

네째 경장 도랑. 다섯째 유통 도랑 모두 하천 하나씩을 넘어서 인의현의 서쪽으로 흐른다.

이들 다섯 곳의 도랑이 닿는 토지는 모두 비옥하다.

이 방죽은 백제와 신라 때부터 있었던 곳으로 농민에게 주는 혜택이 많아 고려 현종때에 다시 옛 제도에

따라 완전 보수하였고, 인종 21년(1143)에 이르러 다시 수축하였으나 마침내 폐기된 채 버려 두어 지식있는 사람들의 통탄을 금할 수 없었다.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래 임금들은 농업 행정에 대한 관심을 크게 기울였다. 1415년 봄에 판상주 이발을 도안무사에 임명하였다. 이 공이 처음에 이 벽골제를 수축하려 했으나 워낙 공사가 거창하고 복잡함으로 이루지 못하고 도관찰 출척사 박습이 경력 권 전, 경차관 박희중과 함께 현지를 답사하고 공사의 난이도를 검토하여 계획서를 올렸더니 마침내 인가를 내리었다. 각 군에서 인부 1만명과 사무원 3백명을 동원하여 옥구진 병마사 김 훈숲과 지김제군사, 김 방에게 전체를 감독하게 하였. 이 해 9월 20일에 착공하여 10월 13일에 준공되었다.

방죽 북쪽에 위치한 대극포는 밀물의 충격이 심하고 남쪽에 있는 양지교는 밑에 물이 깊게 괴어 있어서 공사를 수행하기가 곤란한 곳이었다. 이번에는 밀물이 들이미는 대극포에 먼저 둑을 쌓아 물살을 타고 다음에 양지교의 밑에 있는 물이 차는 곳에 아름드리 기둥을 세우고 보를 걸치고 비계를 매서 다섯개의 목책을 설치하고 거기에다 흙을 다져 넣었다. 또 방축이 허무러진 곳에는 모두 흙을 올려 쌓았고 방죽 안팎에는 버들을 다섯줄로 심어서 기반을 튼튼하게 하였다. 방죽 밑은 넓이가 70척 위는 30척 높이는 17척이요 도랑의 수문은 바라보기에 높은 둔덕과 같았다.

또 장생 중심 경장 등 세 도랑의 문은 과거부터 있던 돌기둥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수여와 유퉁의 두 도랑 문은 돌을 깎아서 주초를 놓고 괴목기둥을 세우고 또 양옆에 세운 돌기둥 중간 홈에는 가로 괴목판을 설치하고 안팎에다 쇠사슬을 연결시켜서 이를 들어올려서 물을 내보내도록 장치하였다. 모든 도랑문의 넓이는 13척 돌기둥의 높이는 15척 땅에 묻인 것이 5척인데 하면에는 돌틈에 쇠를 녹여 부어서고정시켰고 내면에는 또 물막이둑을 쌓았다. 수여와 유통 두 도랑의 수문은 모두 내버려 두기로하고 물막이 둑을 설치하지 않았다. 도랑문은 양쪽에 돌을 다듬어서 기초를 만들고 위에 괴목판을 걸쳐서 사람이 통행하게 하였다.

이상이 시공의 개요다. 이때는 1415년이다. 원비 조선 태종 15년(1415) 지은이와 쓴이는 알수 없음

벽골제 제방에서 보이는 벽골제 쌍룡

이어 벽골제에 살았다는 백룡과 청룡을 소재로 하여 제작된 김제 벽골제 랜드마크 '벽골제 쌍룡' 과 함께 전라북도 대표관광지 벽골제관광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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