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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옥사 주인공 정여립 생가터에 조성된 정여립공원

by Yeongsik_Im 2023.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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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으로 가는 길, 춘향로에서 신리쪽으로 좌회전하여 월암교를 건너 월암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정여립공원' 표지판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조선의 역사는 정여립(鄭汝立)을 반역을 도모한 인물로 기록하여 왔지만 현대에 들어서 비운의 혁명사상가로 주목받고 있다. 대동사상을 제창한 위대한 혁명가로 己丑獄死(기축옥사)의 주인공인 정여립은 완주군 상관면 월암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러기에 전주혁신도시에 정여립로가 있고, 인후동에는 정인신로가 그리고 전주 시청으로 가는 대동길이 있는 것이다.

도로에서 정여립공원까지는 650m 거리였는데 네비게이션 검색을 해보니 티맵이나 네이버지도에도 표시되지 않고 있다.

카카오네비에는 '전북 완주군 상관면 신리 392'로 정여립공원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포스팅을 하며 정확한 지도를 첨부하기 위해 주소를 확인해 보니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월암길 37-27 이고 지번 주소는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신리 392이다.

정여립 공원은 완주군이 2020년에 약 7억 원을 투입해 완주군 상관면 신리 월암마을 한 켠에 조성된 조성된 혁명가 정여립을 기리는 공원이다.

정여립선생 쉼터

먼저 정여립공원으로 가기 전 농로 우측에 세워져 있는 정여립선생 쉼터는 풀밭으로 갇혀 있고 내부도 오랜 기간동안 방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 들어가서 살펴볼 수도 없었다.

정여립공원 안내판

방치되어 있던 정여립선생쉼터를 먼저 보고 왔으니 예상대로 정여립공원도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쉼터보다는 나은 상태였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고 있음을 바로 느낄 수 있는 상태였다.

정여립이 “천하는 공물”이라며 선포한 혁명적 공화주의는 영국 크롬웰의 공화주의보다 무려 60년이나 앞선 것으로 드러나면서 정여립 사상에 대한 평가가 한층 드높아졌는데 잡초가 무성하고 쓰레기가 널려 있는 공원을 보니 답답할 뿐이다.

완주군의 역사성을 찾기 위해 정여립 선생의 정신을 스토리텔링해 컨텐츠화 한 뜻깊은 장소로 조성된 공원은 전혀 관리도 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이대로 놔두면 시골 한구석에 있는 스산한 공터가 되어 버릴듯....관리가 시급해 보인다.

정여립 조형물

정여립공원에는 정여립이 불끈 쥔 오른손을 높게 치켜들고 있는 기개어린 모습을 형상화한 철판 조형물이 중앙에 세워져 있고, 그 주변으로 정여립 생애와 사상, 기축사옥(1589) 등에 대한 이야기가 8개의 오석 안내판에 새겨져 세워져 있다.

조선 중기 사상가이자 혁명가인 정여립은 상관면 월암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 있고, 현재공원이 조성된 장소 일원은 그의 생가터로 추정되고 있다.

정여립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조정이 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생가 집자리를 파서 숯불로 지져 없앤 뒤 소를 만들었고 그곳이 파쏘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아직까지 공원 주변에 남아 있는 뒷산은 파쏘봉, 들판은 파쏘들, 은석동으로 돌아가는 모통이는 파쏘 모통이라는 지명들이 불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우물은 최근까지도 수원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활용하여 정여립이 생전 살던 생가의 우물을 상상하여 복원한 것으로 완주군 상관면 월암리에서 나고 자란 정여립을 기리고자 조성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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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공원을 단체로 방문하고 음료를 마신것 같은데 쓰레기는 그냥 버리고 간 것 같다.

마침 정여립공원 한쪽으로 지나는 전라선 철길로 KTX가 달리고 있다. '무늬만 고속철' 은 안제나 제 속도로 달릴 수 있을지~~~

정여립 조형물 좌우로 8개의 오석 안내판에는 정여립 생애와 사상, 기축사옥(1589) 등에 대한 이야기가 여덟가지 이야기로 새겨져 세워져 있다.

첫번째 이야기 정여립의 생애 및 활동
두번째 이야기
세번째 이야기 학문과 사상
네번째 이야기 기축사화
다섯번째 이야기
여섯번째 이야기
일곱번째 이야기

진동규 시인은 그 한 많은 사연을 〈댁건너 대수리를 잡습니다〉라는 시로 남겼다.

댁건너 대수리를 잡습니다(月岩憦模) 진동규

살던 집은 텃자리까지 파버렸습니다. 그 이웃까지 뒤집어 파서 앞내 끌어 휘돌아 가게 하였습니다.
깊고 깊은 소를 만들어 버렸지만 그때 그 집 주인이 반역했다고, 그래서 전주천 물이 거꾸로 흐른다고,
북으로 흐른다고 소문내고 그런 속샘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댁건너 마을 사람들은 상죽음(上竹陰) 하죽음(下竹陰) 하면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선비들의 죽음
그 떼죽음을, 서방바우 각시바우 애기바우
그 피을음을, 상댁건너 하댁건너 점잖던 자기 마을 이름 위에 불러보기도 해보지만,
어떻게 변명 말씀 한번 엄두를 못 내고 죽어 지내왔습니다.

그 집 뒷산 월암에 달이 뜨면 댁건너 사람들은 월암 아래 소에 들어 대수리를 잡는답니다.
관솔 불을 밝히고, 주춧돌 기둥뿌리 항아리 깨진 것,뭐 그 집 집 주인 뼛속까지 빨아 먹고 자란 대수리들을 잡는답니다. 일삼아 잡아내고 그런답니다.

조선 왕조가 역사 속에서 사라진 뒤에도 그 슬픈 역사가 한이 되어 강물 소리가 여을져 흐르는 곳이 파쏘봉 아래 상관면 월암리다.

여덟번째 이야기 대동사상과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 정여립

정여립의 집터는 파가저택(죄를 범한 자들이 살던 집을 불사르고 그곳에 연못을 만들어 후대에도 집을 짓고 살지 못하게 만드는 조선시대의 최고 형벌) 되어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있다. 이곳이 바로 정여립 생가터이다.

정여립 생가터 표시

정여립선생은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진안군 죽도에 서당을 짓고 학문과 무예를 가르치기 위해 이 마을을 오가고 했는데, 그 죽도 가는 길(현 월암마을 뒷산)은 지금은 순례길과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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