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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관광 10선 - 나주목 객사 금성관

by Yeongsik_Im 2023.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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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도시 나주 여행 중 반드시 들려보아야 할 곳이 있다면 바로 '금성관'이다.

전남 나주시는 올해 초 500만 관광 시대를 견인할 대표 관광명소인 ‘나주 관광 10선’을 최종 발표했다.

나주 관광 10선은 ‘금성관’, ‘영산강 등대와 황포돛배’, ‘빛가람호수공원·전망대’, ‘느러지전망대’, ‘국립나주박물관과 반남고분군’, ‘남평 드들강 솔밭 유원지’, ‘불회사’, ‘산림자원연구소’, ‘천연염색박물관’, ‘금성산’ 순이다.

나주목의 객사 정청인 금성관은 관찰사가 관할 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는 곳이며, 중앙의 사진이 묶던 곳이다. 특히 정청(나주목 금성관)에는 전패와 궐패를 모셔두고 망궈례를 행하던 공간으로, 사신을 접대하고, 왕정의 위덕을 펴서, 관부의 위엄을 세우는 곳이었다.

전라남도 5·18사적지 나주 -3호 표지석

금성관 입구 망화루 좌측에는 '전라남도 5·18사적지 나주-3호'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데 표지석에는 아래와 같이 김준태의 시 "나주, 그대 영원한 참세상의 고향이여"와 함께 새겨져 있다.

 

금성관(옛 , 나주군청)
이곳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나주 군청이 있던 자리로, 5월 21일 광주 외곽이 봉쇄되어 광주 진입이 불가능하게 되자 전남 각 지역에서 모여든 수많은 시위대가 집결하는 장소였으며, 나주 지역민들은 민·관이 합심하여 시위대를 위해 김밥과 주먹밥 등 식사와 음료 및 잠자리까지 제공해 주었던 곳이다. 또한 23일과 24일에는 시위대들이 가지고 있던 M1소총, 카빈소총 등의 총기류를 군청 앞마당에 자진 반납하였던 곳으로 5·18민주화운동 기간 중 나주지역이 평화적으로 시위를 마무리 할 수 있도록 이용되었던 장소이다.

지난 10월 20일부터 23일까지는 나주 금성관·정수루·목사내아·서성문·향교·향청 등 읍성권 문화재 일대에서 천년 목사고을 나주를 배경으로 조선시대 나주읍성 밤거리를 환하게 밝힌 ‘제3회 천년나주목읍성문화축제’가 개최됐다.

특히 망화루 앞은 임진왜란 때 김천일의병장의 출병식, 영조 때의 나주괘서사건, 구한말 단발령 의거, 일제강점기 항일학생운동 등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주무대로 나주인들의 의향정신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금성관 망화루

금성관 관람시간은 1월~4월 09:00~18:00, 5월~6월 09:00~19:00, 7월~9월 09:00~20:00, 10월~11월 09:00~19:00, 12월 09:00~18:00 이며 야간 출입은 금지된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무료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망화루를 들어서면 좌측으로 금성토평비, 사마교비 등 20여기가 세워져 있는 비석군이 있다.
금성관 비석군
금성토평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5호인 금성토평비는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때 나주읍성의 수성군(守城軍)이 동학군과 싸워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5년에 세운 것이다. 원래는 나주목 관아 아문인 정수루 앞에 세웠으나 1930년 금성관 앞으로 옮겼다가 1976년 현 위치로 다시 옮겼다.

비문 내용을 보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나주까지 농민군이 들어오는 과정과 수성군을 이끈 민종렬 목사(1893.11.20~1895 재임)를 중심으로 한 수성군의 방어계획과 나주성 전투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사마교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9호인 사마교비는 조선시대 나주목(羅州牧)이 금성현으로 강등되었을 당시 정지호(鄭之虎 1650.12.25~1653.1) 현감이 사마교를 보수한 내력을 기록하여 1651년(효종 2)에 세운 것이다. 서내동 25-3번지 일대를 ‘사매기’ 라 부르는 유래를 살펴보면 1011년(고려 현종 2) 거란의 침입을 받아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가다 제2대 왕 혜종德宗)의 고향인 나주에 와서 10여일 머물렀다. 이때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리를 지나갔는데 이후로 이 다리를 사마교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비는 원래 서내동 25-2번지에 있었는데 1968년 현 위치로 옮겼으며 규모는 높이 100cm, 너비 37.5cm 이다. 비에는 원래 앞면과 뒷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랜 세월 비바람에 노출되어 마모가 심해 지금은 뒷면 일부 글씨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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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관 우물
금성관 중삼문

금성관은 출입문인 만화루와 중삼문 그리고 가장 안쪽에 내삼문이 있었다고 한다. 중삼문을 지나면 금성관 앞쪽에 내삼문터가 있다.

금성관은 이유인 목사(1487년 4월 12일~1489년 재임)가 망화루와 함께 건립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김개 목사가 1617년 4월 21일 중수하고 1775년 이명중 목사가 개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나주군청사로 사용되다가 1963년 보수를 거쳐 1976년 전부 해체 복원하였다. 이후 나주목 금성관 복원 정비 사업으로 금성관 앞을 가리고 있던 나주군청사를 헐고 금성관의 동익헌(벽오헌)과 서익헌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23년 3월 문화재청 문화재수리기술위원회는 산하 보수분과위원회 회의에서 전남 나주 금성관의 해체·보수 공사 안건을 논의한 뒤 조건부 가결했고, 문화재청과 나주시 등은 설계도를 보완한 뒤 본격적인 해체·보수 공사에 나설 예정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 팔작지붕 건물로 전국의 객사 중 가장 넓은 금성관은 1972년 1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2019년 10월 보물 제2037호로 지정되었다. 전주 객사 풍패지관에 이어 보물로 지정된 객사이다.

금성관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2m가 넘는 금성관 편액

비단 생산지로 유명했던 나주는 통일신라 경덕왕때부터 금성(錦城)으로 불렀다. 1981년 시로 승격 당시에도 금성시였으나 1986년 나주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금성관 편액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보는 견해가 많다고 한다.

금성관의 동익헌 벽오헌 편액
벽오헌 측면
금성관 뒷면
금성돤 뒷면

 

나주는 전국적으로 보호수가 가장 많은 곳으로 4105그루의 전남 지역 보호수 가운데 891그루가 나주에 있다고 한다. 금성관 뒤편 쌍둥이 은행나무, 나주향교에 있는 이성계 은행나무, 나주 목사내아 벼락 맞은 팽나무, 나주읍성 내 이로당 400년 된 명품 해송, 왕곡면 송죽리 동백나무, 공산면 상방리 호랑가시, 다도면 토종 배나무, 불회사 연리지 등이 유명하다.

금성관의 700년 된 쌍둥이 은행나무

 

금성관 뒷편에 있는 보호수인 700년 쌍둥이 은행나무는 나주향교에 있는 이성계 은행나무와 마주보고 서 있다. 금성관 망화루를 나가 우측 중수루 뒤에 있는 나주목사 내아에서는 벼락 맞은 팽나무 앞에서 소원을 빌기도 한다.

중삼문
망화루

 

금성관 인근에는 나주의 대표음식인 곰탕거리가 있다. 나주곰탕은 대구의 현풍곰탕, 황해도의 해주곰탕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곰탕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 나무곰탕집이나 들려 사골육수에 고기의 결에 따라 찢은 사태와 양지머리, 다진 파를 얹은 나주곰탕을 한그릇 하고 가고 싶었지만 대기자들이 많이 있어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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