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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방방곡곡/전북전남

나주읍성 서성문 · 남고문

by Yeongsik_Im 2023.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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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337호인 나주읍성은 전라남도 나주시 성북동과 교동 일대에 있는 성으로 복원된 순서대로 남문은 남고문(南顧門), 동문은 동점문(東漸門), 서문은 영금문(暎錦門), 북문은 북망문(北望門)이다.

우리나라 읍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가 가장 오래된 읍성인 나주 읍성은 고려시대부터 축조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수차례 성벽을 확장하거나 다시 쌓아 면모를 갖추었다. 원래 길이는 약 3.53km로 평지에 남북으로 긴 타원 형태로 쌓았으며 동쪽에 동점문, 서쪽에 영금문, 남쪽에 남고문, 북쪽에 북망문이라 하여 사방에 성문을 두었다.

1916년부터 1920년 사이에 남고문이 마지막으로 철거된 후 성벽터는 대부분 민가가 들어서거나 밭으로 경작되었다가 1993년에 남고문,2006년에 동점문을 복원하였고 2011년 영금문, 2018년 북망문까지 모두복원하였다.

영금문 映錦門

 

고려시대에 지어져 10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나주읍성의 서쪽에 위치한 서성문은 나주읍성 수성군과 동학군의 전투, 즉 우리 민쪽끼리의 전투 역사를 가진 슬픈 사연을 담고 있는 성문이다.

1894년 7월 1일 나주를 점령하기 위해 동학군이 월정봉 정상으로부터 물밀 듯이 밀려와 영금문을 공격하였으나 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이에 음력 8월 13일 녹두장군 전봉준은 당시 나주목사 민종렬과 협의를 위해 나주읍성으로 들어가는데 그때 그 문이 서성문이다.

 

문헌에 주로 '서성문' 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나지만 1815년에 편찬된 것으로 전하는 「나주목여지승람 羅州牧興地勝覺」 에 "동남북 삼문(三門)에는 편액이 없으며 서문에만 ’영금문 映錦門’ 이라는 편액이 있다.”는 기록에 따라 역사를 기록하는 의미에서 영금문 편액을 걸었다. 영금문은 '두루 나주를 비춘다' 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예상된다.

영금문은 2007년 발굴조사 결과 지하에 유적이 잘 남아 있어 제 모습을 찾아 2011년에 복원하였다.
나주읍성 서성문 안내도
영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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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읍성 복원 상량문
서성문에서 보이는 나주향교 이성계 은행나무

 

영금문을 지나 나주읍성 밖으로 나가면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나주향교와 금성산 줄기인 월정봉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영금문 밖에는 사직단 (社穆壇 토지와 오곡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곳) 과

나주의 대표 서원이었던 월정서원(月井書院)있었으나 해방 이후 모두 없어졌다.

서성벽공원

 

국비 116억원이 투입된 읍성권 전통한옥마을 기반시설사업은 읍성권 주요 문화재, 관광지를 하나의 길로 연결하는 명품 관광 코스 개발을 위해 진입도로(L=165m) 개설 및 서성벽, 동헌관, 읍성권 공원 3개소를 조성하는 사업으로 2020년 4월 착공, 2021년에 마무리했다.

 

성밖 바로 앞에는 나주향교가 그리고 영금문에서 조금 걸어 내려가면 금성관, 목사내아, 정수루, 향청, 나주목문화관 등을 관람할 수 있고 나주의 유명 먹거리인 나주곰탕거리와 이어진다.

읍성권내 전통한목마을 지원사업 안내
관광안내소
향교를 품은 교동이야기

 

남고문 南顧門

 

나주읍성(羅州邑城)의 남문(南門)으로 나주시 남내동에 복원되어 있다. 1920년 경 일제에 의해 약간의 석축만 남고 완전 철거되었다. 이후 1993년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으며 그 후 추녀와 천장이 훼손되어 2005년에 보수하였다. 2층으로 된 문루(門樓)로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나주읍성에는 동쪽의 동점문, 서쪽 서성문, 남 남고문, 북의 북망문 중 남고문이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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