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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방방곡곡/전북전남

전주 숲정이성지 6성인과 12복자 순교지

by Yeongsik_Im 2024.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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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진북동 숲정이는 옛 전주부성의 북쪽인데 툭터져 허하다 하여 조선시대 관찰사 이허구(李書九)가 1794년경 대규모 숲을 조성케 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후 이곳을 숲정이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군사훈련장이었으며 또한 인근에는 피 묻은 칼을 씻을 수 있는 전주천이 흐르고 있었기에 사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신유박해(1801) 때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가족의 일부(신희, 이육희, 이순이, 유중성)와 동료(김천애 등)가 순교한 이후로 천주교인들의 피가 마르지 않았던 곳이다.

기해박해(1839) 때는 12년간 전주옥에 수감되어 있던 5명(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과 많은 신자(홍재영, 최조이,이조이, 오종례 등)들이 순교했다. 병인박해(1866) 때는 6명(이명서,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조화서, 정원지)이, 1867년에도 많은 신자들(김사집 등)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숲정이 순교터는 후에 이명서 성인의 후손이 매입해 순교자비를 세웠고, 카톨릭계의 해성중·고등학교가 들어섰다.

1960년 세워졌던 전주 해성중·고등학교가 삼천동으로 이전된 후 순교자 성 조윤호(요셉)를 기리는 "윤호관"과 함게 이곳 성지가 보존되고 있다. 해성고등학교 교정에 있었던 치명탑은 지금은 아파트 숲속에 남아있다.

1866년 병인교난은 5대 종교박해 사건의 하나로 카톨릭신자 13명이 이곳에서 처형되는 사상 유례없는 참극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 이후 전주는 대포작인 천주교 순교지로 꼽히며 성지순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숲정이 순교터는 전라북도지정 기념물 제71호이다

天主敎人殉敎之地 천주교인순교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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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6월 치명비를 세운 직후의 모습 허허벌판이었던 당시의 모습이 인상적이다,<사진 치명비 안내문>

위 사진은 안내문에 있는 1935년 6월 치명비를 세울 당시의 모습이다. 좌측부터 허일록 타대오 신부, 김후생 바오로 신부, 전주지목구 초대 교구장 김양홍 스테파노 신부, 이준화 토마스(이학수의 아들), 이철연 프란치스코 신부 라고 설명하고 있다.

치명비

이명서 베드로를 비롯한 6분의 성인과 이순아 루갈다름 비롯한 12분의 복자 그리고 수않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려 신앙을 증거한 이곳 숲정이는 조선시대 당시 전주성의 장대가 있던 곳으로 군사훈련장으로 사용되던 군영지였다. 그랬던 이 땅을 지금 순교성지로 거록하게 보존합 수 있게 된 것은 이명서 성인의 손자인 이준명 아나돌 덕분이다. ​그는 소앙면 유상리 막고개라는 곳에 초라하게 묻혀계신 할아버지의 유해를 그렇게 모셔둘 수 없다는 생각에 근근자자하게 살면서도 돈을 모아 진안 어은동 모시골메 산을 마련하고 1920년 3월 22일 성인의 유해를 그곳으로 이장하였다.​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자기의 도리름 다하였다고 여기지 않있다.

할아바지를 비롯하여 위대한 신앙의 증거자돌의 피가 뿌려진 이 거록한 땅을 아무런 표식 하나 없이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매입하여 이 땅이 얼마나 거록한 땅인지, 이 거룩한 땅에서 얼마나 위대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리는 치영비들 세우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리고 그 꿈은 끝내 이루지 못하고 세상올 떠난 아버지 이근화 가롤로의 평생 소원이기도 했다. ​

그렇지만 사학역도의 후손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던 재산도 몰수당하고 참으로 어렵게 하루 하루률 살아야 했던 이준명에게 그 꿈은 쉽사리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1929년 평생 당배농사를 지으며 모은 돈과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모은 돈으로 이 거특한 땅 두 마지기를 매입할 수 있었다. 그것이 지금의 숲정이성지를 교회의 소유로 마련하여 거륵하게 보존하는 첫 계기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치명터를 어렵사리 매입하는 첫 번째 꿈을 이룬 이준명은 이제 두 번째 꿈인 치명비를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땅을 매입하는 데 평생 모은 돈을 다 쏟아 부은 그에게는 더 이상의 경제적 능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같은 문중이며 어은동 모시골에서 함께 살았던 이학수 바오로가 이러한 사정을 전해 듣고 1335년 6월, 200원올 들여 화강암에 '天主敎人殉敎之地' 라는 문구를 새긴 십자가비를 세웠다. 그리하여 허허벌판으로 남아 있던 이 땅이 위대한 순교자들의 피가 스며있는 거룩한 땀임을 만천하메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목숨을 바쳐 신망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은 참으로 위대하고 영광스럽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그둘의 용맹스러운 신앙을 이어받아 자키고 보존하려는 우리 후손들의 노력도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는 것올 다시 한 번 가슴깊이 되새기게 한다.
치명비 안내문

숲정이 성지의 순교자들 안내문
십자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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