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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전주/전주한옥마을

전주한옥마을 전주동헌 · 전통문화연수원

by Yeongsik_Im 2022.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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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관아인 동헌과 유서 깊은 고택, 넓은 마당으로 이루어진 전주한옥마을 전주전통문화연수원은 한국인이면 꼭 알아야 할 우리 문화와 사상을 함게 나눌 수 있는 곳이다. 선비들이 익혔던 육예인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와 전통문화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전주시 완산구 향교길 119-6 (교동)에 위치한 전주동헌은 전주향교와 골목길을 두고 좌우로 붙어 있어 전주한옥마을 여행시에는 선비길을 걸으며 함께 관람하면 된다.

일반 관람료는 무료이며 문화연수 및 교육,대관 관련 문의는 063-281-5271-4로 하면 된다.

골목길 좌측은 전주동헌 우측은 전주향교이다.

 

전주동헌 풍락헌

전주동헌 우측에 보이는 건물은 전주향교 서무이다.

전주 동헌인 풍락헌(豊樂軒)은 음순당(飮醇堂)으로도 불리었으며 조선시대 전주부윤(종2품)의 업무공간으로 지금의 전주시청에 대응된다.

조선 초에 건립된 후 1891년(고종28년) 중건(重建)되었으나, 일제강점기 일제가 조선말살정책을 펴면서 1934년 민간에 매각되었다. 당시 동헌을 구입한 전주유씨는 이를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로 옮겨 문중의 제각으로 사용하였다.

동헌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되살리기 위하여 2009년 당시 송하진 전주시장의 노력으로 소유주인 유인수 선생이 제각 건물을 전주시에 쾌척(2007년)함으로써 한옥마을로 옮겨졌다. 동헌이 전주를 떠난지 75년만의 귀환이다. 처음에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28칸 팔작한옥이었던 동헌은 옮기는 과정(1934년)에서 정면 한칸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2009년 현위치에 28칸으로 원형복원되어 이축(移築)되었다.

전주동헌에는 솟을삼문이 세워져 있으나 현재는 이용을 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골목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그 이유인듯 하다.동헌 안쪽으로 들어가서 보면 솟을삼문쪽으로 향사대를 설치해 두었다.

전주동헌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전통문화연수원의 고택쪽 협문을 이용하여야 한다.

현재 전퉁문화연수원 입구에는 행랑채 증축공사를 하고 있다.

전주동헌 솟을삼문

동헌은 120여년 된 옛 건축물로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현판인 풍락헌은 『조선왕조의 발상지 풍패지향 전주(豊)를 안락(樂)하게 하는 집(軒)』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다른 이름인 음순당은 『임금의 덕이 마치 가장 순수한 술을 마신 것처럼 모르는 사이에 취했다가 깨는것처럼 임금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의미이다.

전주 동헌은 관찰사(종2품), 부윤(종2품), 판관(종5품)의 집무실이라고 다양하게 일컬어지는데, 전주부윤의 자리는 관찰사가 겸임한 때가 많았고, 관찰사가 겸임할 때는 대부분 중앙에서 나온 판관이 전주부를 통치했던 연유에서 기인한 명칭들이다. 그러나 원래 전주 동헌은 전주부윤의 집무실이고 전라감영의 선화당은 전라도 관찰사의 집무실이다.

전주부 동헌으로 사용되던 풍락헌(연도불명 사진 전주전통문화연수원 누리집)
고택 출입문
진참봉고택

장혁식 고택 앞 사랑채 건물은 임실군 임실읍 성가리에 소재한 진참봉댁 고택 사랑채를 옮겨 온 것으로 정확한 건축연도는 알 수 없다. 안채는 용인 민속촌 조성 시 매각되어 이축되었는데, 이 사랑채는 김봉순 씨가 매수하여 생활해 오던 중 임실군 도시계획에 의한 도로개설사업 당시 철거 예정이던 건축물을 전주시가 온전하게 인수하여 장현식 고택 옆에 이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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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뜻을 품은 장현식고택

이 고택은 민족의 지도자이자 사회사업가이며 정치가인 일송 장현식(1896-1950)선생이 1932년 고향인

김제시 금구면에 건축한 한옥을 2007년에 옮겨온 것이다. 일제하 독립투사로 평생을 바친 일송 선생의 나눔과 섬김의 정신으로 대동 세상을 실현하였던 의로운 기상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장현식고택 임영식 제4회 전주향교사진전 전시작 中

장현식 선생의 후손인 장남 장홍 씨가 2007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김제시 금구면 전통한옥(안채와 중간채) 일체를 기부했으며 전주시는 이를 전주한옥마을로 이축, 2009년 12월 새로 단장하기에 이르렀다.

장현식 선생 고택은 1930년대 전통방식으로 건축한 한옥으로, 근대 한옥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목재가공의 수준이 아주 정교해 전통한옥으로서 건축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미닫이 문으로도 활용할 수 있게 고안된 안채의 퇴창문은 보는 재미 뿐만 아니라 한옥 대목수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보기 드문 문이다.

2007년 이축하며 사랑채 앞 모과나무와 돌확(돌로 만든 절구)도 함께 옮겨왔다.

일송 장현식, 한그루 소나무 같은 의인김제 금구출신 일송 장현식 선생은 당대 만석을 누렸던 부호 중의 부호였다.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의 지도자였으며 애국지사였다.1919년 4월 독립운동 비밀결사 대동단(大同團)이 창단되자 군영자금을 제공하였고, 대동신문 재정 운영을 맡다 체포되어 1921년 징역 3년을 언도받고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후 선생은 교육사업에 적극 뛰어들어 민족사학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했고, 고려대 설립 당시 본관 2층 8칸 교실을 도맡아 지었으며 동아일보 창간 때는 인쇄기 구입비를 기부하기도 했다. 민족어 보존을 위한 조선어 사전 편찬사업에 당시로써는 거금인 3,000원을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정인승·이극로·최현배·이희승 등과 함께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 독립운동자금 수만 원을 아낌없이 기부해 조국의 독립을 지원했으며 이외에도 당대 예술가나 명망가들에게도 후원하여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해방 후 전라북도 2대 도지사(1949년 8월〜12월)를 역임했다.1950년 6월 28일,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납북돼 그해 10월 24일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선생의 유해는 평양의 재북 인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9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항일독립운동과 교육 사업에 일생을 바친 애국투사 일송 장현식 선생, 흠결 없는 의인으로 숭앙(崇仰)함이 마땅하다.
장현식고택 안내문

사랑채
정읍고택(별채)

보천교고택은 보천교를 창시한 월곡 차경석이 1926년 정읍 대흥리에 세운 보천교 본당 부속건물의 하나이다. 중부지방 이남에서는 보기 드문 'ㅁ'자형 건축물로 2011년에 옮겨왔다.

현재 전주전통문화연수원은 행랑채 증축공사중이다. 행랑채는 연수원회의실, 다목적실, 전통대문으로 구성되며 공사기간은 2022년 7월까지이다. 현재는 좌측 임시출입구를 이용하면 된다.

전주전통문화연수원 행랑채 조감도

행랑채가 지어지면 전주전퉁문화연수원의 담장넘어 피어있는 코스모스와 넓은 마당은 볼 수 없겠지만 전주전통문화연수원을 상징하는 멋진 행랑채로 완공되기를 기대해 본다.

가을날 촬영한 전주전통문화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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