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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전주/전주한옥마을

호남의 삼한 전주 한벽당 · 요월대

by Yeongsik_Im 2022.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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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승암산 기슭의 절벽을 깎아 병풍바위 아래 세운 아담한 정자인 한벽당은 과거에는 바위에 부딪친 안개를 '한벽청연'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다.

오늘은 임제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무주 한풍루(寒風樓), 남원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호남의 삼한(三寒)으로 꼽은 자연과 어우러진 풍류의 멋을 머금은 고풍적인 누각 전주 한벽당(寒碧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을 소개한다.

전주뿐만 아니라 호남의 명승으로 알려져 시인 묵객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들던 곳인 한벽당은 옥처럼 항시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에 부딪쳐 정경이 마치 벽옥한류 같다 해서 한벽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벽당 뒤쪽 굴다리 1980년도까지만 해도 전라선은 지금의 덕진광장인 덕진역과 전주시청자리에 있던 전주역을 지나 이 곳 한벽당 굴다리를 지나며 전주천을 끼고 달렸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1년 철로를 놓는다는 명분 아래 한벽당을 허물려 했으나 금재 최병심이 반대하면서 한벽당 뒤로 굴을 뚫어 전라선이 개통됐다.

눈내리는 날의 전주 한벽당과 요월대 2021년 1월

한벽사경(寒碧四景)

 

따스한 봄볕 견훤성에 핀 진달래와 강나루의 수양버들(春日東城花柳)

땡볕의 폭염 속에 만마관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夏炎萬馬淸風)

가을 숲 옥류동에 비추이는 소슬한 가을하늘(秋林玉洞晴霞)

한 겨울 밤 남고산 자락에 비추이는 백설의 달빛(冬夜南固雪月)

한벽당기적비와 한벽당

한벽당은 월당 최 담이 1416년(태종 16)에 지었다.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집현전직제학을 지낸 최 담은 고려 말 중랑장 최용봉의 장남으로 말년에 전주 발이산 밑에 한벽당을 짓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처음에는 월당루(月塘樓)라 하였다가 후에 '벽옥한류(碧玉寒流)'란 시귀에서 '한벽(寒碧)' 2글자를 따와 '한벽당'이라 했다.

한벽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한벽당 측면 편액
김예산이 9세에 쓴 한벽당 편액
한벽당 정면 편액은 강암 송성용 선생의 글씨이다.
요월대 편액의 글씨는 석전 황욱 선생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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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안에는 시인과 묵객들이 걸어놓은 현판들과 중건기 등이 걸려있다.

명필 이삼만과 한벽당
한벽당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그들이 제영(題詠)한 시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 '호남읍지(湖南邑誌)' 등에는 이경전, 이경여, 이기발 등 20 여명의 저명한 인사들이 한벽당에서 지었다는 시문이 지금도 게첨돼 있는 등 그 시절의 풍류를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한벽당에는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꼽히는 창암 이삼만(1770-1847) 선생의 부채 이야기가 전해진다.『창암이 젊었을 때의 일이다. 폭염은 쏟아지는데 땀으로 후줄근한 삼베바지 적삼을 입은 부채 장수가 한벽당 그늘을 찾아들었다. 날은 더운데 부채는 팔리지 않아 잠시 다리쉼이나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벽당 시원한 그늘에 앉으니 절로 졸음이 쏟아져 부채 장수는 코를 골며 이내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자고 일어났더니 누군가 부채에 글씨를 휘갈기고 있는게 아닌가."여보시오, 보아하니 선비 같소만 남의 부채에 이러는 법이 어딨소?"부채 장수는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너무 노여워 마시오. 이 부채를 들고 성내로 들어가 보시오. 해 전에 다 팔릴 것이오"부채 장수는 부채가 팔리지 않으면 변상을 시킬 요량으로 선비의 집을 미리 확인해놓고 전주부내로 들어섰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전에는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팔리지 않던 부채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값을 올려도 마찬가지였다.금세 호주머니가 두둑해진 장수는 선비가 일러준 집으로 찾아갔다. 아까 함부로 말한 것을 사과하며 장수는 선비의 이름을 물었는데, 그 선비가 다름 아닌 명필 창암 이삼만이었다.』
전주시 문화관광

한벽당 앞을 가로막은 기린대로 밑으로 나가면 수양버들이 늘어진 시원스런 전주천 옆으로 쏘가리, 메기, 모래무지 등의 민물고기 생선매운탕으로 유명한 오모가리탕 집들이 모여 있었는데 지금은 남양집, 화순집, 한벽집 만 남아 있다.

여름이면 버드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오모가리탕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밥값내기 고스톱을 치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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