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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전주/전주한옥마을

전주한옥마을구석구석 전주경기전 ③ 부속건물 등

by Yeongsik_Im 2022.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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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구석구석 꼭 가봐야 할 곳 중에 전주경기전을 정전과 어진박물관으로 나누어 소개했고 이제 경기전의 부속건물 등과 함께 전주경기전 ③을 소개한다.

 

 

전주한옥마을 전주 경기전 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정전

전주한옥마을 경기전으로 가는 길 돌담 옆 정원은 언제나 예쁜 꽃들이 반겨준다. 6월 17일과 18일에 열리는 전주문화재야행 준비가 한창인 전주경기전을 16일 돌아보았다 전주 경기전 하마비 H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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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 전주 경기전 ② 어진박물관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조선왕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410년(태종 10) 태조의 엊니을 전주에 봉안하였다.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어진은 현존하는 유일본이며,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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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경기전의 경역은 태조어진을 모신 정전과 함께 조경묘로 나뉘며 부속건물들과 별전이 따로 있는 광범위한 성역이었다. 부속건물로는 수복청, 마청, 용실, 조과청, 제기고, 어정, 수문장청(경덕헌), 전사청, 동재와 서재 등이 있다.

수복청

수복청은 경기전의 제사에 대한 일을 맡아보는 하급관원들이 수직(守直)하는 곳으로 주로 큰 일이 있을 때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다.

경덕헌

경덕헌은 경기전을 지키는 수문장이 일을 맡아 보는 곳이다. 경기전의(慶基殿儀, 경기전의 규모와 연혁, 제향을 맡는 관원의 역할과 각종 제향 절차 등을 한자 등으로 기록한 책) 에 수문장청(조선시대 궁궐문을 지키던 수문장들의 소속 관청)을 갑자년 신설하여 을축년 준공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경덕헌은 수문장청에 붙여진 이름이다.

동재와 서재

동재와 서재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어진 집으로 재각이라고도 하며 제관들의 재계의식을 하기 위한 곳이다. 재계의식은 제사에 임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 신을 맞을 준비를 하는 의식이다.

어정

어정은 임금의 음식을 만들거나 임금이 마실 물을 기르는 우물을 말한다. 종묘, 사직단 등 임금이 참여하는 제례에 사용하는 우물도 어정이라고 한다.

제기고

제향때 사용하는 각종 그릇, 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제사 때 사용하는 그릇은 일반 그릇과 달리 정갈하고 성스러운 물건이어서 별도의 건물에 보관하여야 하는 것이다. 대개 제기고와 같은 건물은 바닥을 마루바닥으로 만든다. 마루바닥은 지면과 분리되어 있어 습기가 차지 않아 기물을 보관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전사청과 조병청

전사청은 나라제사에 제수준비와 제상 차리는 일을 담당하는 전사관이 집무하면서 제사 준비를 하는 곳이고 조병청은 떡이나 유밀, 다식 등의 제사 음식을 만들고 보관하는 장소이다.

용실은 제수용 음식을 만드는 방앗간으로 디딜방아와 절구를 두고 경기전 제례에 사용되는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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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의 부속건물을 둘러 싼 돌담길로 나오면 전동성당을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찍기 좋은 포토존이 있다. 커플들의 사진명소이기도 하다. 현재는 전동성당은 보수 공사중이다.

경기전 돌담길에서 촬영한 전동성당

 

 

전주한옥마을 경기전 조경묘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과 그 부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한은 신라때 사공(司公, 도성을 쌓고 고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한 벼슬)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고, 구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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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사고자리는 경기전 정전의 동쪽에 임시로 어진을 모시던 별전이었으나 그 자리에 전주사고가 복원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時政)을 기록하였으며 한 임금이 전왕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실록이라 하고 특별히 설치한 사고에 봉안하여 왔었다.조선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년(태종 9)부터 1413년(태종 13)까지 4년간의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1426년(세종 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세종 13)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 • 정종 • 태종의 3조실록 각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과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2부는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년(세종 27)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 • 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각 1부씩 분장하였었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때 춘추관 • 충주 • 성주의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병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손홍록, 안의 등이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이안, 사수하였기 때문이다.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권 514책 47궤, 기타 전적이 64종 556책 15궤가 봉안되어 있었다.1597년 정유재란때 실록각은 소실되었는데 1991년 이를 복원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전주경기전 전주사고 안내문

 

 

전주한옥마을 경기전에서 조선왕조실록 포쇄 재현 행사 열려

국보 제151호이자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 포쇄(曝曬) 재현 행사가 전북 전주한옥마을 경기전(사적 제339호) 전주사고에서 어린이날인 5일 열렸다. 포쇄는 실록 등 주요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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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보전기적비
매화나무
예종대왕 태실과 비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26호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태항아리에 담아 석실에 묻었는데 이를 태실이라 한다. 이 곳에는 조선 8대 임금인 예종의 태를 묻은 태실과 태실비가 있다. 원래는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있었다. 1928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전국에 있는 태실의 태항아리를 서울로 가져가면서 태실들이 훼손되었는데 예종의 태실도 이때 훼손되었다. 이후 태실온 구이초등학교 북쪽으로 옮겼다가, 1970년에 경기전으로 옮겨왔다. 비석을 태실과 함께 옮긴 것으로 앞면에는 '예종대왕태실'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선조 11년(1578)에 처음 비를 세웠으며, 영조 10년(1735)에 다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태를 담았던 태항아리와 지석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내항아리를 담은 외항아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기전 안내문

전주경기전의 대나무숲 포토존
전주경기전의 가을
전주한옥마을 경기전앞에서 펼쳐지는 전통연희퍼레이드 기접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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