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방방곡곡/서울경기

오산화성궐리사 공자를 모신 사당

by Yeongsik_Im 2022. 8. 20.
728x90
반응형

궐리사 (闕里祠)는 공자(孔子)가 탄생한 궐리촌(闕里村)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우리나라의 궐리사는 강릉, 제천에도 있었으나 현재는 이곳 오산 화성과 논산 노성에만 남아 있다. 노성 궐리사는 지난 4월에 방문하여 블로그에 소개했었다.오산 궐리사는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로 1994년 4월 20일 지정됐다.

 

 

공자를 모신 사당 충청남도 논산 노성궐리사

- 우리나라에는 화성과 노성 두 곳에만 남아 - 23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 논산시 노성면을 지나며 문득 궐리사가 생각이 났다.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노상산성길)에는 명제고택과 노성향교가 나

hyanggyo.tistory.com

오산화성궐리사(烏山華城闕里祠)

궐리사는 공자의 64세손인 공서린이 서재를 세워 후학을 지도하였던 장소이다. 공서린은 중종 때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에 정조가 이 장소에 사당을 짓도록 하고 정조 16년(1792)에 ‘궐리사’ 라는 현판을 내려 주었다. 조선으로 이주한 공자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이곳에 공자가 태어난 중국 산둥성 곡부현의 실제 지명을 붙인 것이다.
궐리사는 고종 8년(1871)에 훙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리기도 하였다.그러나 고종 31년(1894)에 제단을 마련하여 다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고 고종 37년(1900)에 건물을 갖추어 성적도를 모셨다.현재 궐리사에는 외삼문에 ‘성묘’ 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계단 입구에 하마비가 있다. 경내에는 공자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성적도를 모신 장각 (藏閣) 이 있다. 그 사이 공간에 1993년 7월 중국 산둥성 곡부현에서 기증한 ‘공자상’ 이 있다. 그 외에도 1996년 세운 강당인 행단(吉壇)과 ‘양현재(養賢齋)’ 등이 있다. 오산시 궐리사는 논산에 있는 노성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의 2대 궐리사로 꼽힌다.
오산 궐리사 안내문

하마비 '대소인하마비'라고 새겨져 있다.

외삼문

참고로 향교나 사당을 관람하며 출입할때는 입문과 출문을 구별하여 이용하여야 한다. 오른쪽 문이 들어가는 문이고 왼쪽문이 나오는 문이다. 가운데 문은 신문이므로 혹 열려있어도 이용해서는 안된다.

성묘로 오르는 계단
성묘 내삼문
내삼문 성묘 편액이 걸려있다.
성묘
성묘와 장각

장각은 사방이 1칸인 익공계 맞배지붕 집으로 안에는 공자의 화상과 행적을 그린 중국의 성적도(聖蹟圖)를 본떠 만든 궐리사 성적도와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오산 궐리사 성적도는 197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궐리사 성적도 中 성문사과 (聖門四科)

궐리사 성적도는 유교의 성인(聖人)인 공자의 생애를 그림 과 글로 목판에 새 긴 것이다. 고종 41년(1904)에 공자의 76 세손인 한국인 공재헌이 조병식, 송병선 등과 함께 중국 산둥성에서 성적도를 구해와 이를 새겨 목판을 만들었다.이 목판은 피 나무로 되 어 있으며 모두 60장이다. 한 장의 크기는 세로 32cm, 가로70cm, 두께 1.5~2cm 정도이다. 목판에 새겨진 그림은 비교적 정교하나 글은 그렇지 못하다.궐리사의 성적도 목판은 실제로 책을 찍는 데에 사용되었다. 근대 국가로 이전하던 시기에 유림들은 유학의 명맥을 잇기 위해 공자를 구심점으로 삼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궐리사의 성적도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성적도로 그 가치가 높다.
오산 궐리사 성적도 안내문 참고
728x90

궐리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오산시 아름다운 나무 1호

궐리사 성묘 좌측에 심어져 있는 이 향나무는 정조 17년(1793) 궐리사 창건 당시 식재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수목으로 1970년 태풍으로 가지가 소실되었으나, 동쪽으로 뻗은 가지가 남아 부러진 채 자란 모습이 예술적 조형미가 돋보인다.

성상전 삼문
성상전
이 공자상은 1993년 7월 산둥성 곡부현에서 기증했다.
행단(杏壇)

오산 궐리사 행단(杏壇)은 중국 곡부 성묘 대성전 앞에 있는 행단을 참고해서 2009년 8월에 누각형 한식목조로 건축한 국내 유일의 행단이다.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동재 화성궐리사강당이라고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다.
공자문화전시관
서재인 양현재
오산궐리사 수령 500년 은행나무

오산시 궐리사 은행나무는 중종 40년(1519) 공서린이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서재를 세우면서 심은 나무이다. 공서린은 중종 2년(1507)에 생원이 되고 그해 식년(조선시대 과거제도로 정기시를 말하며, 과거 종류로는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뉜다)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간원 정언을 거쳐 대사간·병조 참의 등을 지냈다. 좌승지에 올랐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풀려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 이 자리에 서재를 열고 은행나무를 심은 후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궐리지(關里誌)』에 따르면 공서린이 은행나무에 북을 매달아서 학업을 권고하는 신호로 사용했다고 한다. 공서린은 중종 33년(1538)에 다시 조정에 나갔으나 중종 36년(1541)에 별세하였는데 은행나무도 이때 말라 죽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약 이백년 뒤에 은행나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정조 16년(1792)에 정조가 이 장소에 사당을 짓도록 하고 ‘궐리사’ 라는 현판을 내렸다. 이 은행나무는 궐리사를 상징하는 나무로, 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