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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방방곡곡/경북경남

부산 기장읍성 · 기장공덕비군 · 기장옛길

by Yeongsik_Im 2023.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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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읍성 機張邑城 Gijangeupseong Walled Town

기장향교 방문을 마치고 약 1,7km 거리에 있는 기장읍성을 방문했다. 기장 읍성은 동문터와 남문터를 돌아보았는데 약 5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기장향교쪽에서 가면 동문쪽을 먼저 보고 남눈쪽으로 이동하며 장관청을 경유하여 이동하면 된다.

기장읍성은 1996년 5월 25일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2022년 부산 기장읍성의 완전한 복원을 위해 읍성 주변 부지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추가 지정됐다. 이에 따라 기장군은 문화재 보호구역 추가 지정에 나선 뒤 토지 매입까지 마무리되면 기장읍성의 완전한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및 문화재 복원정비사업에 나설 예정이라고 한다.

기장군과 부산시는 지난 1999년부터 현재까지 기장읍성 문화재 복원 정비사업에 힘써오며 2018년에는 남문 일원 발굴조사를 통해 성벽을 둘러싼 해자(성 주위를 판 못)를 복원했고 관아시설인 장관청은 지난 2014년 복원을 완료했다. 최근 조사에서는 향청지와 객사지, 사창지 등 주요 관아시설이 확인돼 전체적인 복원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군은 내년 그동안의 발굴·연구 성과에 대한 학술회의를 열고 문화재청 국가사적 지정을 위한 심의에도 재도전할 계획이라고 한다.

기장읍성 남문

기장 읍성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왜구의 빈번한 침략으로부터 기장현의 각종 시설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기장읍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에 걸쳐 있으며,둘레는1 k m 정도로 너비 7m, 높이 3m 정도의 성벽만 남아있다.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 의하면 세종 7년(1425)에 돌로 쌓았으며 규모는 둘레 1,527척(포백척, 약 713m)이었으나, 성종 21년(1490)에 남쪽으로 더 쌓아서 3,197척(영조척,약 981m)이 되었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반원형의 옹성문(甕城門)이 3개소, 성벽에 붙은 적을 물리치기 위한 사각형의 적대(敵臺)가 6개소,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장인 여장(女墙)이 383개소, 연못과 우물이 각각 1 개소가 있었다.읍성 내부에는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東軒)과 관아 건물, 누각(樓閣), 창고, 무기고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성벽과 건물이 철거되고 이후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는 기장현 소속 군인들을 지휘하던 장관들의 집무처인 장관청(將官廳)만 원래의 자리에 복원하였다.기장읍성은 고려 시대의 성곽 축조 기법을 유지하면서 조선 시대 초기 읍성과 축조 기법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 · 문화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장읍성 안내문

기장읍성 남문 옹성

2017년 이후 수차례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남문 옹성은 체성(體城)과 동시에 축조된 것으로 체성에서 약 8.2m 가량 돌출되어 있다. 평면형태는 반원형의 편문식으로 서쪽에서 반원상의 시계방향으로 만곡하다가 동쪽에 개구부(開口部)를 설치한 형태이다. 옹성은 조사 당시 내외벽 기단석이 1단 잔존해 있었으며,축조수법은 내외협축식이다. 개구부는 체성 진행방향과 나란하게 조성되었고, 평면형태는 입구부가 넓고 진입할수록 좁아지는 사다리꼴이다.

규모는 반원상인 옹성 외벽 둘레가 약 47.5m, 옹성 내벽 둘레는 약21.7m이다. 너비는 7m, 잔존 최대 높이는 1.3m 내외이다. 개구부 너비는 3~3.5m로 확인된다. 남문지는 잔존상태로 보아 최소 2차 이상 축조되었다. 발견된 명문석의 金■,昌原,義城 등으로 보아 남벽 및 남문 축성역(築城役)에 동원된 군현(郡縣)을 알 수 있다.
기장읍성 남문 옹성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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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읍성 복원 조감도

기장읍성 동문

기장읍성 동문터

기장공덕비군

기장읍성 동문에 오르면 입구에 기장공덕비군이 있다.

조선때 동래방면에서 기장현청으로 들어오는 용소골 장승배기를 비롯하여 남문 밖 그리고 종로거리와 현청사 주위에 세워져 있던 긱종 비석 36기가 도시 확장과 새마을사업 등으로 유실 돨것을 우려한 孫泰道선생(당시 국제신문 근무, 향토사학자)의 노력으로 1972년 기장토등학교 정문 왼쪽에 모아 보존되어 왔다.

2004년 도로 확장을 하면서 동문 앞 현 장소로 옮겨 정비했는데 이 비석들은 현재 기장군의 중요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관찰사비 7기, 수군절도사비 1기, 어사비 1기, 현감비 14기, 군수비 5기, 아전비 2기, 객사건성비 1기, 교량개축 등 2기, 기타 3기가 있다. 비석들 중에는 철비 3기가 있다.

철은 나무나 돌에 비해 강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공덕비 건립이나 맹세의 상징으로 철비를 세웠으며, 동양사상에서 악한 것을 물리치고 지기(地氣)가 강한 곳을 누른다는 비보풍수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좌측부터 현감이공기수거사비, 현감함공영석거사비, 현감최공진일청덕비

기장옛길

남문 앞 기장옛길 안내 해동지도 기장현 18세기 중엽 규장각

지도는 지역의 모습을 가장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드러내어 시각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한다. 현재 남아있는 기장의 고지도는 대부분 조선후기 이후에 편찬된 것 들인데 기장옛길을 표시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지도는 18세기 중엽 제작된 「해동지도」의 군현지도이다. 홍문관에서 1751 〜 1752년(영조26〜 27)에 제작된「해동지도」는 회화식으로 작성된 비변사의 도별 군현지도첩을 원도로 활용하여 일부 보완한 지도이다. 「해동지도」의 기장현지도는 주기를 지도 이면에 기록하지 않고 지도 여백에 기록함으로써 지지적인 내용을 지도와 동시에 파악할 수 있어 지역 파악이 한면 에서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든 체제이다. 기장현의 진산인 탄산을 포함한 주요산천,성곽과 관아,역원,면,창 등이 표시되어 있으며 도로를 적색으로 그려 놓았고 기장현의 호구,경지면적,지역의 둘레,군병총수,환곡총수,각 면의 위치,지형적 특성,군명,산천,고적, 교량,봉수,역원,토산 등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기장현지도는 동래부의 지도에 비해 많은 소하천들이 발원하여 사방으로 흘러가는 지형으로 산지가 많은 군현임을 표현하고 있어,도로 또한 산과 하천을 따라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다른 군현지도와 달리 기장현지도에는 각 도로가 대로 • 중로 • 소로 등으로 나뉘어 표시되어 있는 것이 특이한데,길은 남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수영계 대로, 양산계 중로,동래계,울산계 대로 등으로 연결되고 있다. 수영계 대로는 남문에서 사 라 리 — 무 곡 리 — 야 지 리 - > 수 영 계 대로,사라리一무곡리—무지산현一주사, 양산계는 남문一이천현一쌍교동一연구리一와여리—비음현一구로一양산계, 동래계는 남문一이천현一쌍교동一고촌리-*운봉리—동래계,울산계는 두 갈래 길이 있는데,하나는 남문一>동문앞—모산리一동전리—이천리—니전리一좌동리 —산지리一울산계,다른 하나는 남문一동문앞一모산리一동전리一이천리一예림리 —가동리一추현리一울산계 대로로 가는 길이다. ​

기장현 지도에는 기장의 4대 사찰이라고 하는 선여사,안적사,장안사, 취정사로 가는 길도 기록되어 있다. 선여사는 울산계 대로의 임기리에서 가는데 현에서 30리라고 하고 있고,안적사는 수영계 대로에서 내동리에서 소로를 따라 가는데 현에서 15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안사는 울산계 대로에서 소로를 따라 가는데 현에서 4 7 리이며, 취정사는 울산계 대로 니전리에서 가는데 현에서 15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장옛길 안내문

기장읍성 남문에서 약 100미터 앞에 장관청이 있고 동문은 400m, 기장향교는 1.7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장관청 앞에는 부산광역시 기념물 58호인 기장 동부리 회화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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