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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거창 갈천서당 居昌葛川書堂

by Yeongsik_Im 2023.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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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에서 빼재를 넘어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로 가는 길 1001번 도로변에 있는 갈계리삼층석탑을 지나면 우측으로 소정천의 좌안 곡저 평야에 거창갈천서당(居昌葛川書堂)이 입지하고 있다.

서당은 그 지역의 선비와 백성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으로 서당에는 대개 7~8세 의 남자아이들이 입학하여 15~16세까지 초 • 중급 정도의 유교 경전을 공부했다.

거창 갈천서당은 조선 선조 6년(1573)에 갈천 임훈이 벼슬을 그만둔 뒤, 고향 에서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동생인 첨모당 임운과 함께 세웠다. 갈천 임훈은 안음현 갈천동에서 태어나 1540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광주 목사 부임을 마지막으로 낙향하였다. 1584년 향년 85세로 별세하였다.

고종 15년 (1878)에 후손들이 현재의 건물로 다시 세웠으며 조선 시대의 서당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93년 12월 27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갈천서당은 강당과 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은 솟을삼문으로 지어졌으며,강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지붕건물이다. 평면은 좌측부터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1칸, 마루 2칸,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갈천서당은 마학동에 1530년에서 1540년 사이에 갈천 정사로 건립되었다. 이후 성팽년이 갈천 서쪽 석담의 아래에 있는 회암 위에 이건하였다. 그러나 병란으로 소진되어 중건하였으나 다시 화재로 멸실되었고1878년에 팔완당의 후손 정지화가 주축이 되어 유림들의 도움으로 중건하였다.

갈천서당 편액

서당 내부에는 갈천서당중수기, 갈천서당중건기, 갈천서당명, 갈천서당중건기후, 갈천서당개건상량문 등 기문이 걸려있고, 서당의 처마 밑에는 당시 사용하던 큰북의 외통이 걸려있다고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갈천서당중수기(葛川書堂重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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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천서당중건기후(葛川書堂重建記後)
갈천서당명(葛川書堂銘)
갈천서당개건상량문(葛川書堂改建上樑文)
서당 좌측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1칸
오른쪽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2칸
묘정에는 갈천 선생 신도비를 비롯해 도계 선생 은진 임공 추모비와 첨모당 신도비관련항목 보기가 나란히 서 있다.
서당 경내 동쪽 밖에 있는 고직사와 화장실

갈천 선생은 부역 제도와 군정의 폐단을 개혁하려고 노력하는 등 백성을 사랑하는 목민관으로서 추앙받았으며, 이황의 문인으로서 학문 또한 깊었다. 갈천관련항목 보기의 사상은 성(誠), 경(敬) 중심의 실천 철학으로 요약할 수 있고,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등과 교우하였다. 문집으로는 『갈천 문집』이 있다.

거창 갈천서당은 갈천 선생의 정사로 갈천의 애민 정신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갈천서당 주변에는 은진 임씨 집성촌이 있으며, 집성촌 안에는 서간 소루(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52호)가 있고, 강 건너 서남쪽에는 거창 만월당(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70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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