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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물관 ① 부산관 · 동래관

by Yeongsik_Im 2023.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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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7월 11일에 개관한 부산 박물관은 2002년 5월 3일 전시실을 새롭게 단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민들의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 증진과 연구를 위해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부산의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으며, 부산지역의 선사ㆍ고대ㆍ중세문화를 규명하기 위한 학술조사와 발굴유물의 보존처리, 보관 및 박물관 교육 등을 통해 시민들의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높이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

부산박물관은 부산관, 동래관,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먼저 동래관과 부산관을 소개하고 야외전시장을 이어서 소개한다.

부산박물관 입구

부산박물관 관람시간은 평일 및 일요일 : 09:00~18:00 이며 17:00 까지 입장할 수 있다. 1월 1일, 매주 월요일 휴관하며, 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휴관한다.

관람료와 주차비는 무료이며, 휠체어와 유모차가 준비되어 있으니 안내데스크에 문의(051-610-7150)하면 된다. 20명 이상의 40명 이하의 단체(초등학생 8세 이상)는 매일 3회 실시 (약 1시간 정도 소요됨)되는 박물관 전시해설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문의는 (051)610-7164, 7167, 7150

부산박물관 전경
부산박물관 동래관으로 외국인 관람객들이 들어기고 있다.

부산박물관은 2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명칭은 동래관(구석기시대~고려시대)과 부산관(조선시대~근현대시대)이다. 두 개 전시관의 원래 명칭은 제1관과 제2관이었으나, 2014년 1월 9일 현재의 명칭인 동래관과 부산관으로 개칭되었다.개칭의 배경은 부산의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는 명칭으로 바꾸어 부산을 대표하는 박물관으로 거듭나기 위함이었으며, 여러 차례 의견 수렴과 신중한 검토를 거쳐 현재 명칭으로 확정하였다.

제1관과 2관의 명칭을 동래관과 부산관으로 개정한 이유는 제1관은 구석기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주로 동래지역에서 발굴 수집한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가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며, 동래라는 지명은 757년(신라 경덕왕 16)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제1관 전시구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주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제2관은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 근현대 자료들로 전시가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며,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부산이라는 지명이 제2관 전시 구성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 주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동래부산고지도
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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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지정유형문화재 제181호 백자 구름 용무늬 호 白磁靑畵雲龍文壺 백자청화운룡문호 높이: 45㎝, 입지름: 17cm

운룡문이 그려진 용준(龍樽)으로,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에 그려진 청룡도상과 일맥상통하고 있으나 다소 정형화된 특징을 보여준다. 운룡문의 유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필력과 구름문의 거침없는 회화적 묘사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부산박물관 소장 청화백자의 운룡문은 도화서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제작시기는 청화백자 제작이 17세기 말 이후 다시 시작된 점, 운룡문의 전체 형태가 1720년(경종 즉위) 『숙종명릉산릉도감의궤』의 청룡 도상과 부합하는 점 등에서 18세기로 추정되며, 크기가 높이 40~50㎝ 내외로 대형인 호의 용도는 화준(花樽)으로, 소형은 주준(酒樽)으로 연구된 바가 있어, 부산박물관 백자청화운룡문호는 화준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백자청화운룡문호는 18세기에 생산된 입호 형식의 백자항아리로 완형일 뿐만 아니라 운룡문의 표현이 정확하여 같은 시기 의궤의 도상과 부합한다는 점에서 18세기 관요에서 제작된 청화백자 용준(龍樽)의 실례로서 의의가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부산박물관 홈페이지 참고>

금동여래좌상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 부산광역시지정기념물 제17호

숙종 9년(1683) 동래부사와 대마도주가 왜관의 운영을 위한 금제조항 5가지를 정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높이 140, 너비 68의 비석이다.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출입을 금한 경계 밖으로 나오는 자는 크고 작은 일을 논할 것 없이 사형으로 다스린다.

2. 노부세(뒷돈)를 주고 받는 것이 발각되면 준 자, 받은 자 모두 사형으로 다스린다.

3. 개시하였을 때 각 방에 들어가 몰래 암거래하는 자는 피차 사형으로 다스린다.

4. 일본인은 5일마다 여러가지 물건을 공급할 때 아전, 창고지기, 통역 등을 일체 끌어내려 때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5. 피차 범죄인은 왜관 문 밖에서 함께 형을 집행한다.

임진왜란으로 폐쇄되었던 왜관이 선조 40년(1607) 부산의 두모포(현재의 수정동 부근)에 다시 설치되자 밀무역과 잡상행위 등 왜인들의 각종 범법행위가 횡행하였는데, 숙종 4년(1678) 초량(현재의 용두산 일대)으로 왜관을 옮긴 이후에는 더욱 심해져 폐단이 많았으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 금제조항을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측은 한문으로, 일본측은 일문으로 새긴 비석을 수문 안과 왜관 경계선에 각각 세웠는데, 이때 조선측에서 세운 비석이 이 약조제찰비이다. 현재 비신만 남아있는 상태로, 비신 상부가 둥근 형태인 것으로 미루어 원래부터 비석머리에 올리는 이수나 귀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재료는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원래 초량왜관이 있었던 용두산 공원 동쪽에 있던 것을 부산시립박물관으로 옮겨와 야외정원에 전시하였으나 현재는 박물관 전시실 내로 옮겨 전시 중이다.<부산박물관 홈페이지 참고>

육군 소년병 모집 포스터
반상회 표시등
공병우 한영 타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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