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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전주/온고을 구석구석

전주 아중저수지 무릉마을 효자 열녀 정려비

by Yeongsik_Im 2024.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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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는 아중저수지 관광명소화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케이블카와 야간경관 조성 사업에 있다. 소양 IC를 나와 전주로 오는 길에 잠깐 아중저수지를 둘러 보는 중에 무릉마을에 교지라고 쓰여진 안내판을 발견했다. 나이가 들수록 모든 곳이 다 않좋아 지는데 나는 아직 성성한 것은 눈밖에 없는 것 같다.눈이 중요한 직업이 그러한 만큼 ㅎㅎ  

효자 송준호 정려와 효자 송원민과 그의 처 경주최씨 열녀 정려

기린봉으로 올라가는 무릉마을 입구, 호수산장 앞에 교지 안내문과 함께 정려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문이나 비각은 없이 석조 기둥에 비석갓을 얹은 상태였다.

 

정려(旌閭)는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을 세워 표창하던 풍습으로 시작됐다. 정문·정려를 세운 것은 신라 때부터이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와서는 전국적으로 상당수 세워졌다.

 

교지(敎旨) 안내문에는 '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의 상서에 의하여'과 ' 장례경(常禮卿) 계제과장(稽制課長)'아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예식원(禮式院)은 황실의 의식과 제사, 예의 절차를 맡아보면서 음악에 관한 사무를 관리하는 관청이고 여기에는 예식 경(禮式 卿), 부 경(副 卿), 예식과장(禮式課長)과 기록과장(記錄課長),  주임관인 예식(禮式), 칙임관 장례경(掌禮 卿),  계제과장(稽制課長), 장례(掌禮), 상례(相禮), 찬의(贊議)와 장의(掌儀),  악사장(樂師長)과 주사(主事)와 이하, 악사(樂師)가 있었다. 

광무 9년(1905년)에 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의 상서에 의하여 전주 향토인 송원민 여산송씨 지신공파  25세는 타고난 효성으로 넉넉치 못한 가정생활에도 늙으신 어버이를 맛있는 음식으로 보양하고 어버이가 좋아하시는 술상에 이웃 노인들을 맞이하며 20여년간을 즐거웁게 하여 드린 부친의 뚯올 받들어 순공(純恭)하였으며 처(妻)이신 최씨역시 숙녀요조로 남편의 뚯을 받들며 효도로 시부모를 섬기던중 남편의 병이 중태하자 천지신명에게 기도하고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살을 도려내어서 수혈하고 북두칠성께 기도하여 수십일을 연명케 한 후 병의 악화로 돌아가신후 가슴을치고 뛰며 통곡하는 등 지극한 효도로 당시의 예절로 장사후 3년간을 시묘를 한효자 송원민과 그 처인 열녀 최씨의 열열한 효성 및 그 아들 송준호의 효행을 치하하여 광무9년(1905년) 7월 31일 교지를 받들게 되어 정문(旌門)을 세우고 자손들에게는 효자 후손으로 칭송하며 잡역올 일체 면제케하는 주상(主上)의 어명이 내려졌다. 장례경(常禮卿) 계제과장(稽制課長)

효자 송준호 정려와 효자 송원민과 그의 처 경주최씨 열녀 정려

2기의 정려비 비신에는 孝子 司果 礪山宋公俊浩之閭 (효자 사과 여산송공준호지려), 다른 한쪽에는 孝子 學生 礪山宋公元敏之閭 (효자 학생 여산송공원민지려), 烈女 宋元敏妻 慶州崔氏之閭 (열녀 송원민처 경주최씨지려) 라고 새겨겨 있다.

정려각과 정려비에 대해 서예가 이승연교수가 2020년 10월에 새전북신문에 기고한 글이 있어 함께 소개한다.

 

 

이승연교수의전북문화재이야기정려각과정려비

이승연서예가원광대동양학대학원초빙교수 조선시대에는유교의지켜야할덕목가운데효孝·충忠등을장려하고이를시각적으로사람들에게보이게하여본받게하므로서이상적인유교사회를만들고자

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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