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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방방곡곡/서울인천경기

천년고찰 여주 봉미산 신륵사 神勒寺

by Yeongsik_Im 2021.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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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여주 신륵사 神勒寺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의 물이 감싸안은 풍광이 뛰어난 나지막한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고찰이다. 조선초기 학승인 신미의 제자였던 김수온은 "여주는 국토의 상륙에 위치하여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라 블리었는데 신륵사가 이 형승의 복판에 있다."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2021년 6월 9일 늦은 오후에 여주의 천년고찰 신륵사를 방문했다.

여주 남한강 황포돛배 세종대왕호

일반적으로 사찰은 깊은 산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 비해 신륵사는 푸른 물줄기와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신륵사를 들어서며 남한강이 바라다보이는 강변길을 걸었다.

황포돛배가 정박하고 있는 남한강에서 수상스키를 즐기고 있다. 남한강은 황포돛배와 함께 다양한 수상레저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남한강이 지나는 여주는 3도의 물산을 수송하는 황포돛배가 다녔던 물길로 이포와 조포하는 2개의 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여주시에서는 황포돛배를 타고 남한강을 유람할 수 있는 남한강 황포돛배 체험을 운영하고 있다.

봉미산신륵사 일주문

신륵사는 고려 우왕때 마암이라는 바위 부근에서 용마가 나타나자 나옹선사가 신력으로 다스렸다하여 신력의 신(神)자에 륵(勒)자를 합쳐 신륵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신륵사 템플스테이
신륵사 비석군
일주문을 지나 조금 걸으면 우측에 아띠다원이 있고 불이문를 만난다.

신륵사는 천왕문이 없고 일주문을 지나 조금 걸으면 바로 불이문이 나온다.

신륵사 불이문
신륵사 불이문

신륵사 구룡루
구룡루는 신륵사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의식의 집전장소이다.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구룡루
범종각
범종각에는 법고와 목어, 운판, 범종이 있다.
관음전
봉송각과 명부전
신륵사 명부전
봉송각과 소대

봉송각은 사십구재, 또는 기타의 재를 모신 후 떠나가시는 영가님들을 극락세계에 태어나시도록 마지막 전송하는 전각이다.

팔각원당형석조승탑과 원구형석조승탑

신륵사 명부전과 조사당 사이에는 팔각원당형석조승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과 원구형석조승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4호)이 있다.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은 명부전과 조사당 사이 서편 언덕에 있으며 주인을 알 수 없는 두 기의 석조 승탑 중 하나이다. 승탑은 스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것으로 흔히 부도 또는 사리탑이라고도 부른다. 이 승탑은 둥근 공 모양을 한 탑신정왕 위에 건축물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이 올려져 있기 때문에 원구형 승탑이라고 부른다. 보통 탑신에 명문(銘文)을 새겨 승탑의 주인공을 표시하지만 이 승탑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의 승탑인지 알 수 없다.

승탑의 아랫부분인 기단부에는 사각의 지대석 위에 중대석과 상대석이 올려져 있다. 상대석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중대석에는 팔각의 모서리에 세로로 구슬을 꿰맨 듯 연결시킨 모양의 연주문형 기둥이 새겨져 있다.

탑신 위의 옥개석은 기왓골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용머리 4개가 사방으로 표현되어 있다. 옥개석 위의 상륜부는 가로로 구슬을 꿰맨 듯 연결시켜 만든 무늬가 새겨진 받침 위에 2단의 보륜과 그 위에 1 개의 보주가 올려져 있다. 승탑의 형식으로 볼 때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아름다운 문양이 비교적 세밀하게 새겨져 있어서 중요한 문화재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승탑은 원래 신륵사 조사당 뒤 북쪽 구릉 너머에 있었는데,1966년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승탑은 스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것으로 흔히 부도 또는 사리탑이라고도 부른다. 이 탑의 탑신부 안쪽에서 사리를 모신 사리합이 발견되었지만,탑신에 승탑의 주인공을 표시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서 승탑의 주인은 알 수 없다. 그 대신 각 면에 문비형과과 범자효우를 도드라지게 새긴 점이 특이하다.

이 승탑은 통일 신라 시대부터 유행한 팔각형의 탑신광땅 위에 건축물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을 얹었기 때문에 팔각 원당형 승탑이라고 부른다.

승탑의 아랫부분인 기단부에는 사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이 차례로 올려져 있다.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아래로 향하게 새겨져 있고,중대석은 무늬가 없는 둥근 모양이며, 상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위로 향하게 새겨져 있다. 탑신 위의 옥개석 용머리 끝에는 여덟 개의 큼직한 귀꽃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위의 상륜부에는 복발, 보륜, 보주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원형석이 차례로 올라가 있다.이 승탑은 탑의 형식으로 볼 때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승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신륵사 향나무 보호수

경기도 보호수인 신륵사의 향나무는 수령이 약 600년이며 수고는 5m, 나무둘레는 1.3m 이다.

신륵사 조사당 보물 제180호

여주 신륵사 조사당은 낮은 기단 위에 앞면 1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있는 조선 시대의 절로, 원래는 신라 시대에 지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 놓은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중앙에는 지공 화상재원이 모셔져 있고,그 좌우에는 무학 대사와 나옹 화상의 영정이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인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이러한 구조를 다포라 한다. 앞면에는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였고,옆면에는 앞 1 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조사당은 아담하지만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조선 전기의 조각 기법이 드러난 건물이다,

신륵사 조사당 뒤의 계단을 오르면 3개의 보물을 볼 수 있다. 바로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보제존자석종앞석등 이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보물 제228호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은 고려 우왕 5년인 1376년에 건립된 선각대사의 사리탑이다. 종 모양의 탑신을 안치한 단층의 탑으로 종수는 보주현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석종 형식은 인도의 불탑 형식을 가미한 고려 말기의 석종형 부도형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크기는 높이 160cm, 지름 110cm 이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는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석종형 승탑 옆에 세워진 비석이다.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승려로, 양주 화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령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보물 제229호

보제존자석종비는 1379년(고려 우왕 5)에 세워진 비로 비문의 내용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당대의 우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한편,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이름을 글의 맨 앞이 아닌 끝부분에 적은 것은 드문 예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비의 형식이 잘 드러난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앞석등 보물 제231호

나옹선사의 묘탑 앞을 장식한 회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보제존자석종앞석등은 양련과 복련을 새긴 기단위에 팔각의 화사석을 갖고 있는 석등이다. 화사석의 높이는 67cm, 지산전체의 높이 193cm 이다. 보제존자 나옹의 사리탑을 밝히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후기 석등의 대표적 양식을 갖춘 귀중한 작품이다.

보제존자석종앞석등에는 비천상과 이무기가 조각되어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 神勒寺極樂寶殿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불교의 여러 보살과 부처 중에서 서쪽의 극락세계의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불전으로 신륵사의 중심 불전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무량수전, 보광전, 아미타전 등이 있다. 이후 고려 말 나옹 선사 혜근스님이 1376년에 이곳에서 돌아가신 후 왕실의 후원을 받아 크게 다시 지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英陵)이 인근으로 옮겨지면서 왕릉을 수호하고 필요한 물건을 준비하는 능침사찰이 되어 1472년에 다시 크게 수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크게 수리가 이뤄지면서 1678년에 지금의 극락보전이 다시 세워졌다. 극락보전은 이후 1797년부터 1800년까지 다시 수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모습을 보면 평지에 길게 다듬은 화강암을 3단으로 쌓아 기단을 만들었고, 주춧돌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그대로 사용하였다. 둥근 기둥을 사용하고 지붕은 옆에서 보면 ‘八(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네 모서리에는 길게 뻗은 지붕 끝을 받치기는 가느다란 기둥 4개를 설치하였다. 지붕과 기둥 사이에는 지붕 무게를 골고루 받아 기둥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공포가 설치되어 있는데 기둥 위 뿐 만 아니라 그 사이에도 2개씩 빼곡히 설치하였다. 건물 앞쪽에는 문을 달고 옆과 뒤쪽은 흙벽을 쌓고 그림을 그려 넣었다. 내부에는 마루를 깔고 고주(高柱;바깥의 다른 기둥보다 높게 실내에 설치하는 기둥)를 세우고 불단을 그 앞쪽에 두었다.

신륵사 극락보전(神勒寺極樂寶殿)은 다른 사찰의 불전과 비교했을 때, 규모는 작지만 공포를 높고 화려하게 두면서 여기에 비례하여 지붕도 크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왕실의 보호를 받고 왕릉을 지키는 역할에 따라 건물의 격식도 높이는 조선 시대 불교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제225호
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제225호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은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2단으로 기단을 쌓고,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홍황을 쌓아 올린 것이다. 통일 신라와 고려 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통일 신라나 고려의 양식과 전혀 다르다.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돌을 한 장씩 쌓는 방식을 취하였다.

바닥 돌 것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 조각은 형식적이나,특이하게도 물결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은 두꺼워 탑의 안정감을 높여 주며,위충 기단의 모서리에는 꽃 모양이 새겨진 기둥이 있고,각 면에는 용무늬가 깊게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얇은 한 단이며,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추켜 올라가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각 부분 아래에 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 시대 석탑의 특징이 일부 드러나지만,세부적으로는 그러한 특징을 벗어난 표현도 나타난다. 하안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 하며,전체적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 석탑과 돌의 재질,조각 기법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1472년조선 성종 3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이 탑도 이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극락보전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보물 제1791호
신륵사 삼성각
신륵사의 600여년된 은행나무는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신륵사 다층전탑 보물 제226호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은 아래로 한강이 보이고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전탑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몇 기가 남아 있다.

이 탑은 2단으로 기단을 쌓고,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탑이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가 올라가 있어 7층으로 보이기도 한다.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적인 인상이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4충 이상은 1단으로 되어 있으며,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충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있는 머리 장식은 얇다.

지금 탑의 형태를 원래의 모습으로 보가는 어렵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 오는데, 그 비에 1726년(조선 영조 2)에 고쳐 지었다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 탑이 세워진 연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벽돌의 문양 등을 근거로 고려 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다.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각
신륵사 대장각기비 보물 제230호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은 화강암을 깎아 만든 삼층탑으로,신륵사 다층전탑 근처 강변의 암반에 세워져 있다. 불교에서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무덤 양식에서 기원한 것이다.

탑을 지탱하고 있는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넓적한 한 장의 돌로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는 사각형의 상대중석과 갑석을 올려 놓았다. 상대중석의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의 우주와 탱주를 새겼고,그 위를 덮고 있는 갑석에는 연꽃무늬가 아래로 향하게 새겨져 있다.

기단부 위의 탑신부는 3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1층과 2층의 탑신에 해당하는 들의 네 모퉁이에는 기둥 모양의 우주가 조각되어 있으나 심하게 닳은 편이다. 그 위에는 건축물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이 올려져 있는데,기울기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고 그 아랫부분에 새겨진 받침은 3단이나 4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3층 탑신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상륜부도 모두 없어졌다.

고려 말 나옹 화상을 화장한 장소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조각이 부드럽고 탑신부의 짜임새가 간결하여 고려 후기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삼층석탑과 강월헌
여주 전통가마

여주 신륵사를 나오다 보면 인근에 전통가마불지피기를 체험 할 수 있는 여주 전통가마(등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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