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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향교와 서원/경기도

안성향교 한국의 향교 163 경기도 안성

by Yeongsik_Im 2024.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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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향교( 安城鄕校)는 몇년 전 지나는 길에 들렸으나 문이 닫혀 있어 관람을 하지 못했는데 지난 10월 6일 아침 안성향교를 잠시 돌아 볼 수 있었다. 안성향교는 1983년 9월 19일 경기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고, 풍화루(제2092호)와 대성전(제2091호)은 2020년 12월 28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었다.

우라니라의 문루 중 가장 큰 11칸 규모의 풍화루가 반겨주는 안성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우|해 나라에서 세운 지방 교육기관이다. 양민효로 이상이면 향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시나 문장을 짓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의 경전 및 역사를 공부하는 경학원평이 주요 교육내용이었다. 향교는 고을 크기에 따라 학생 수를 조정하였는데 대체로 군에서는 50명, 현에서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안성향교는 1486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건물 배치는 아래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학생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그리고 풍화루(風化樓)가 있고 위쪽에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 • 서무가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안성향교의 건축 양식이 타 향교와 다른 점은 풍화루이다. 보통 향교의 출입문이 외삼문이 있는 것과 다르게 안성향교는 2층 누각형 건물인 풍화루가 있는데 1층에는 출입구 2층에는 마루가 설치된 형태이며 2층 마루는 향음주례나 기로연 등의 향교 행사와 학생들이 휴식공간으로 활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풍화루는 동재와 서재가 같이 이어져 있다.

안성향교 풍화루(安城鄕校 風化樓)는 2층으로 지어진 누각 형태의 건물로 하층은 안성향교의 출입구, 상층은 유생들이 시를 짓고 사색을 즐기는 휴식 공간으로 쓰였다. 풍화루의 규모는 정면 11칸, 측면 1칸이며 지금까지 전해지는 우리나라 향교 문루 중 가장 크다. 풍화루는 향교 내부를 효과적으로 가리면서도 위압적이거나 답답해 보이지 않게 지어졌으며 상층으로 올라가면 누마루가 넓게 트여 있어 시원스러운 느낌을 준다.


이 건물은 조선 초에 처음 세워져 임진왜란에 소실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다시 지은 것으로, 부족한 목재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구조적 안정성과 시각적 안정감.조화로운 비례감을 잘 구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풍화루의 하층 기둥 일부는 처음 지었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이 기둥을 깎고 다듬은 모양과 영쌍창(靈雙窓 창호 가운데에 기둥을 두어 창문이 두 개처럼 보이게 하는 기법) 등은 조선 중기 의 건축 연구에 중요한 학술 자료로 평가받는다.
조선 시대의 학교둥록 「學校騰錄」에 '풍화루 및 동재의 방올 포함한 다섯 곳이 천둥과 벼락으로 깨지고 부서졌다’는 것과 1902년에 수리를 했다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안성향교 풍화루 측면
안성향교 하마비
풍화루 출입문으로 보이는 명륜당
풍화루 하층 내부
명륜당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다.
명륜당 편액
동재와 서재 풍화루와 이어져 있다.

경사지에 건립된 안성향교와 풍화루는 그 특징을 잘 살려 외부에서 향교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향교 전면을 효과적으로 가리면서도 측면 규모를 1칸으로 하여 내부의 명륜당에서 볼 때 위압적이고 답답해 보이지 않도록 적절한 높이와 규모를 가진 건물로 평가된다.. 

명륜당 뒤 내삼문으로 오르는 계단
내삼문
안성향교 대성전과 동·서무를 아이폰 파노라마로 촬영해 보았다. 왜곡이 심하지만 그럭저럭 봐줄만 하다.
대성전

대성전은 공자와 중국 및 우리나라 선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향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이곳에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분향례가,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는 석전대제를 봉행한다.


안성향교 대성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7세기 중엽에 다시 지었다. 1872년과 1883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했지만 아직까지 건축의 형태와 구조, 의장 등 지어질 당시의 특징이 잘 남아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건물의 전면 1칸에는 전퇴(前退)를 두었다 .정면에 기둥을 세워 처마를 길게 드리운 툇간은 조선 시대 향교 건축물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툇간을 구성하는 퇴량 위에 수직으로 걸어 지붕을 받치는 주심도리(기둥의 중심 위에서 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른 나무) 를 승두( 도리 하부에 설치하여 도리와 직교하는 부재를 안정적으로 고정시키는 목재)로 고정한 점, 서까래 끝에 짧은 서까쾌를 덧붙여 겹처마를 구성한 점 등, 조선 중기 건축 기법의 특징들이 잘 남아 있다. 대들보, 중보, 종보를 갖춘 삼중량의 지붕은 17세기 전반, 주로 남부 지방의 건축물에서 보이는 양식인데 특이하게도 중부 지방에 있는 이 건물도 삼중량 지붕올 얹고 있어 귀중한 학술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대성전 안내문
동무와 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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