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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문호사 汶湖社 정효각(旌孝閣)

by Yeongsik_Im 2021.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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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문호사 汶湖社 정효각(旌孝閣)

 

첨성대 좌측 뒤로 문호사가 보인다.

경주 첨성대 옆 27호 고분앞에는 사당이 하나 있는데 문호사라는 사당이다. 문호사는 조선중기(1515-1599) 성리학자 관란(觀滿) 이승증(李承曾)선생의 서원 유적지로,공의 충효정신을 받들기 위하여 제향하는 곳이 다.

문호사(汶湖社)와 정효각(旌孝閣)
문호사(汶湖社) 와 정효각(旌孝閣)
관란이선생 정효각(旌孝閣)
관란이선생정효비
관란이선생정효비
관란이선생창의비(觀瀾李先生倡義碑)

아래에 문호사 안내판의 내용을 옮긴다.

문호사는 조선중기[1515-1599] 성리학자 관란(觀滿) 이승증(李承曾)선생의 서원 유적지로,공의 충효정신을 받들기 위하여 제향하는 곳이다.

선생은 신라(新羅) 좌명공신 (位命功臣) 인 휘(講) 알평(講平)의 후손으로,중종(中宗) 10년(1515)에 경주부 중리에서 출생하였다. 공의 뛰어난 충효를 기려 세인들은 그의 시묘(侍墓) 살던 지명 (地名)을 충효(忠孝)마을로 불렀다. 중종 37년(1542)에 보문보(普門狀)를 막아내 한발에 대비한 공덕이 오늘날까지 빛나고 있다.

명종(明宗) 13년(1558) 사마양시 (司馬兩試)에 합격하고도 명리(名利)에 뜻이 없어 전후 일곱 차례나 관직 의 제수를 사양하여 세칭(世稱) 칠징사(七微士)로 존칭(尊稱)되고,오직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시다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78세의 노령임에도 경산 자인(慶山 慈仁)에서 창의(倡義)하여 적진(敵陣)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대구지역 사림(士林)에 격문(撤文)을 보내 ‘무릇 선비는 충성과 효도가 있을 뿐이니 어찌 나라가 이토록 위급한데 대구에 의기(義氣)가 적연(寂然)한가’ 하니,이를 본 대구 청도 등지의 선비들이 뒤따라 일어나 향토를 지키는데 함께했다. 선조 32년(1599) 85세로 고종(考終)하시니,나라에서 정려(施間)를 내리고 사림(士林)은 사우를 지어 제향(祭享)하였다. 순조 21년(1821)에 후손들은 공의 유고를 모아 관란 이선생문집(觀潤 李先生文集)을 발간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공의 유적인 문호사(汉湖社)와 정효각 그리고 창의비가 있다. 九容箴. 九思箴, 六有箴, 三畏箴, 造化論, 易論, 詩格論 외 시 30여 편이 있다.

참고문헌:동경지,삼강론,여지승람,경주읍지,신라의 얼,경주풍물지 리지,관란이선생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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