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방방곡곡/대구경북

안동 가일전통문화마을 · 권오설선생 기적비

by Yeongsik_Im 2024. 12. 4.
반응형

안동 하회마을로 가는 길에 들렸던 가일마을은 안동에 남아 있는 많은 전통마을 중에서도 원형 보존이 잘 된 마을로 약 600여 년의 전통과 오래된 삶의 흔적이 지금의 모습과 잘 조화를 이루는 곳이었다. 인근에는 고택체험 한옥스테이로 유명한 수곡고택, 시습재(병곡종택)와 남천고택, 노동서사가 있고 마을 초입에는 폐교된 풍서초등학교를 활용한 안동역사문화박물관이 있고 하회마을은 5km 거리에 있다.

가일전통문화마을

600년 세거지 가일마을은 고려시대에는 왕(王)씨가 살았고, 그 뒤에 풍산 류(柳)씨가 대대로 살았다.
가일마을은 고려개국 공신인 태사공 권행(權幸)의 후손인 안동 권씨(安東 權氏) 복야공파가 일가를 이루고 살았던 곳으로, 세종 때 정량(正郞)을 지낸 참의공(參議公) 권항(權恒)이 이곳의 부호 풍산 류씨 하회 입향조 전서공(全書公) 류종혜(柳從惠)의 숙부인 류개(柳開)의 손자 류서(柳揟)의 사위가 되어 터전을 잡게 되었다.

순흥안씨 또한 류서의 증손녀에게 장가들어 오늘날까지 세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역사로 안동권씨, 순흥안씨 합동으로 류서의 묘소에 현재까지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가일마을 입향조 참의공 권항 이후 화산(花山) 권주(權柱), 병곡(屛谷) 권구(權榘), 정봉(定峯) 안담수(安聃壽)를 비롯하여 학문에 열중하여  문집 및 유고를 남긴 사람이 스물을 넘으며 또한 퇴계 이황의 처향(妻鄕)이기도 하다.

조선 중기 연ㅅ나조에 화산 권주의 오 부자 중 네 분이 연이은 사화(士禍)로 희생되었으며 7대에 걸쳐 의금부 금부도사가 세번이나 다녀간 영남 유일한 곳이다.

근대에는 우암 권준화를 필두로 권오현, 권영식, 권오설, 권오상 둥 열세분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으며 역사적으로는 대한광복회사건 및 6.10만세운동에 족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마을 뒤로 삼각형의 잘생긴 봉우리를 정산이라 하며 여러 풍수연구가들에 의하면 영남 8대 양택지(陽宅地) 중 하나로 불려진다. 가곡(佳谷)은 마을의 옛 이름인 가일(佳日)과 지곡(枝谷)에서 한자씩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가일전통문화마을 이야기>

가곡지
가곡지 달그네
가일마을입구 버드나무 보호수 1982년 지정 당시 수령 200년
가일마을 쉼터
가일마을 쉼터
회화나무 보호수 1982년 지정당시 수령 300년

항일구국열사 권오설선생 기적비

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권오설(權五卨 1897~1930)선생의 삶과 뜻을 기리고자 2001년 11월 11일 이곳 고향 가곡동(가일마을)어귀에 세워졌다.  이 기념비가 세워지고 4년이 지난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은 뜻깊은 해에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권오설 선생 기적비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관리번호 31-1-58)로 지정되었으며 안동권씨 참의공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권오설 선생 기적비

권오설 선생의 삶은 33년 짧은 순간이나, 남긴 공적은 영원히 전할 만 하다. 전남 도청에서 근무하던 선생은 광주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옥고를 치르고 귀향한 뒤, 고향마을에  원흥학술강습소를 시작으로 가곡농민조합, 안동청년회, 조선노동공제회안동지회(1920), 풍산학술강습소(1922), 풍산소작인회(1923) 등을 만들고 이끌어 나갔다.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긴 선생은 사회주의로 민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화요회, 조선노농총동맹,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총괄 기획하고 추진한 최고지도자가 바로 선생이다. 이로 말미암아 구름된 선생은 출옥 100일을 앞둔 1930년 4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 고문으로 온 몸에 피멍으로 얼룩진 채 순국하였다.

기적비 건립 협찬록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