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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향교와 서원/충청북도

충주향교 한국의 향교 169 충청북도 충주시

by Yeongsik_Im 2025.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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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9일 충청북도 충주시 교동9길 1(교현동) 에 위치하고 있는 충주향교를 방문했다.

충주향교는 1398년(태조 7년) 건립될 때에는 계명산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조령에서 충주를 거쳐 한양으로 쳐들어가면서 향교를 불에 태웠으나 충주 읍리인 석천수(石天壽)와 숙부 석감(石鑑)이 향교에 봉안된 위패를 잘 간수하여 위패만큼은 보존이 되었다. 충주향교 좌측에는 석천수와 석감을 기리는 사당인 호성사(護聖祠)가 있다.

 

그 후 1629년(인조 7) 현재의 교현동에 옮겨 세웠고 1897년(고종 28)과 1936년에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1980년 1월 9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방문 당시 충주향교의 건물은 대성전과 동무·서무·명륜당·내삼문·외삼문이 있었고 공부자묘정비각이 있었다. 외삼문은 공사중이었다. 국가유산청과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구석구석의 충주향교 안내에는 동재와 서재가 남아있다고 안내하고 있는데 동재와 서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충주향교 명륜당

충주향교 외삼문은 현재 공사중이기 대문에 명륜당 좌우측에 있는 협문을 통해 들어가면 된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앞에 두고 제향공간인 대성전을 뒤에 두는 구릉지에 세워진 향교의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륜당에 있어야 할 동재와 서재는 볼 수 없었고 우측에는 공자를 찬양하는 당나라 시인 피일휴(皮日休)의 글이 새겨져 있는 공부자묘정비각이 세워져 있었다.

공부자묘정비각
공주자 묘정비
공부자 묘정비 설명문

공부자 묘정비에는 공자를 찬양하는 당나라 시인 피일휴(皮日休)의 글이 새겨져 있다. ‘공자의 학식과 덕을 통하여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다.’는 내용과 ‘석가모니는 전생의 징후를 밝히지 못하였으나 만물의 이치를 밝힌 이는 공자이니 곧 성인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내삼문

내삼문은 12단의 가파른 돌계단을 울라야 한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성전과 좌우로 동무 및 서무가 나온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전면 1칸을 퇴로 한 홑처마 맞배지붕의 형태이며, 동무와 서무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대성전과 동서무
충주향교 대성전

충주향교 대성전에는 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의 5성과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등 4현, 그리고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충주향교 대성전 봉안위차도
서무
동무
홍살문
하마비

충주향교 하마비에는 자세히 보니 대소인원하마(大小人員下馬)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는 대인 소인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다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것이다. 향교는 문묘에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으로 여겼기 때문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과차자개하마(過此者皆下馬), 또는 하마비(下馬碑)라고만  새겨진 하마비도 있다.

호성사(護聖祠)

호성사

호성사(護聖祠)는 석감과 그의 조카 석천수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충주향교 좌측에 위치하여 동향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석감과 그의 조카인 석천수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충주향교가 불탈 때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계명산으로 들어가 온전하게 보존하였다. 이로써 전쟁이 끝나고 1629년 문묘를 다시 세우고 위패를 봉안할 수 있었다. 이에 유림에서는 부 분의 기리는 뜻에서 호성사를 세우고 오정에 이 사실을 알려 숙종임금은 석감에게 병조참판을, 석천수에게는 장예원 판결사를  증직히였다고 한다. 

 

1981년 보수하여 현재 사당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충주향교는 매년 봄과 가을에 호성사에서 석감과 석천수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향교동산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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