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서원

구미 동락서원 東洛書院

by Yeongsik_Im 2022. 3. 24.
728x90
반응형

구미 인동향교에서 낙동강변쪽으로 100여 미터 내려가면 동락서원이 자리잡고 있고 그 앞이 바로 동락 신나루터이다. 경상북도 구미시 수출대로(임수동) 327-13 에 위치한 동락서원(東洛書院)은 1654년 여헌 장현광 선생의 강학지소로써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고 선현들의 학문과 유교정신을 받들기 위해 세워졌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되었다.

동락서원 문루인 준도문 앞에는 장현광이 마을 숲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손수 심어 키웠다는 400년된 은행나무가 우뚝 서있다. 한국의 향교를 탐방하며 많은 은행나무를 보았지만 높이는 거의 최고 수준으로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올라 있다.

동락서원 은행나무 1982년 9월 20일 보호수로 지정됐다.
동락서원 문루 준도문 (遵道門)

이 서원은 여헌(旅奸)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효종(孝宗) 6년(1665) 제자들이 건립한 건물이다. 숙종(肅宗) 2년(1676)에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그러나 고종(高宗)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32년 사당을,1971년에는 부속건물도 복구하였다.장현광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몰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미를 모아 전장에 보냈다. 그러나 삼전도(三田渡) 굴욕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동해안 입암산으로 들어간지 반년만에 별세 하였다.서원 내의 건물로는 사당인 경덕사(景德神), 강당(講堂), 동·서재(齋), 3칸의 문루(門樓), 4칸의 고사(庫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은 모두 6칸으로 가운데는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는 각기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동락서원 안내문

동락이란 동방의 이락(伊洛)이란 뜻으로 이락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공부하던 중국의 이천(伊川)과 낙양(洛陽)을 가리킨다. 뒤에 주자(朱子)가 그들의 학통(學統)을 이었기에 결국 동락은 정주학(程朱學), 주자학(朱子學)의 근원이자 상징이라는 의미다.

동락서원은 조선 성리학의 근원이 되는 서원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 것이다.

중정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마루는 원내의 행사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며, 협실의 동쪽 방은 헌관실, 서쪽 방은 재석실(齋席室)로 사용된다.

728x90

중정당
동락서원 중정당의 현판
근집재(謹執齋) 동재
윤회재(允懷齋) 서재

동재와 서재인 근집재(謹執齋)와 윤회재(允懷齋)는 유생들의 기숙하면 공부하던 곳이다.

경덕사 내삼문
묘우인 경덕사에는 장현광과 장경우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동락서원은 여헌 장현광선생을 비롯한 만화당 장경우 선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한 향사를 매년 봄(음력 2월)과 가을(음력 8월) 두 차례 봉행하고 있다.

여헌 장현광(張顯光, 1554~1637년)은 호는 여헌(旅軒), 자는 덕회(德晦), 시호 文康, 보현현감, 이조참판, 대사헌, 영의정 추증 됐으며, 조선 중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와 과학사상가로 성리학 주도 사회속에서 동양과학 중 우주론의 체계를 수립 한 ‘우주요괄(宇宙要括)’을 저술했다.


 이후 조선중기(임진왜란 후) 구미, 상주, 영천, 안동 등 낙동강을 따라 여러 곳을 다니며 성리학과, 도학 등을 강론·토론해 현대 학자들로부터 여헌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중류지역 성리 학자를 ‘낙중학파’로 재조명 되고 있다.
 참고로 여헌을 배향하고 있는 서원은 동락서원(구미), 금오서원(구미), 송학서원(청송), 임고서원(영천), 빙계서원(의성), 천곡서원(성주)이 있다.

신도비각

Lecture Hall of Dongrakseowon

Gyeongsang-do Cultural property Material No. 21

Location : 373, Imsu-dong, Gumi-si, Gyeongsangbuk-do


This seowon(village school) was built by the disciples of Jang Hyeong-gwang(1554~1637), whose pen name is
Yeo Heon, in memory of his scholarship and integrity in 1665, the 6th year'of Joseon King Hyojong, In 1871,
it was honored with the calligraphic board grantded by King Sukjongj But it was dismantled by the order of 
Regent Lee Ha-eung, father of King Gojong, The shrine was reconstructed in 1932, and annexed building in 1971,
Throughout his life, Jang Hyeon-gwang devoted himself to scholarship and educating the young. During
the Chinese invasion of Korea in 1636, he recruited volunteering militia and supplied food for Korean 
soldiers. When he heard the King s surrender to the Chinese army, Hyeon-gwang was infuriated and retired to MT. Ibamsan. Six months later, he died there.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