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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방방곡곡/전북특별자치도

호남천주교발상지 완주 초남이성지

by Yeongsik_Im 2022.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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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지난해 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자 유해와 유물이 200여년 만에 발견돼 큰 관심을 끌었던 완주 초남이성지를 다녀왔다. 신해박해(1791년) 때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복자의 유골과 신유박해(1801) 때 순교한 윤지헌 프란치스코 복자 등 3인의 유해와 유물이 확인됐고, 유해는 초남이성지 교리당에 안치됐다.

호남천주교발상지 표지석

먼저 호남천주교발상지인 초남이 생가터를 들렸다.

호남천주교발상지 1784년 표지석 뒤에는 '柳황검 아우구스 티노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李승훈 베드로로부터 같은 해 서울에서 세례를 받아 고향 초남이에 와서 최초로 선교를 시작하였음'이라고 새겨져 있다.

호남천주교발상지 입구

입구를 들어서면 우측에 초남이성지(Chonami Shrine)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아래와 같이 쓰여져 있다. 다 읽어보는데 5분정도 걸린것 같은데 관리하시는 수녀님께서 나오셔 안내를 해주신다.

초남이성지는 복자 유항검(柳恒檢) 아우구스티노(1756-1801)가 나고 자란 곳으로, 그와 그의 가족이 박해의 위협 속에서 복음을 몸소 실천한 삶의 현장이다. 신학문을 하는 이들과의 접촉으로 진리에 눈을 뜬 유항검은 1784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직접 교 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었다. 숙식을 제공하면서까지 정성껏 교리를 가르쳤으며 멀리 금구와 고창과 영광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호남 최고의 부자로서 평소에 가속들과 이웃에게 적극적으로 베풀었고、종들을 형제처럼 대하는 덕스러운 삶을 살았기에 빠른 시간 안예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가성직제도에서 사제로 활동하였지만 이 제도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남을 가장 빨리 알게 되어 동생 유관검과 함께 이를 알리고 멈추도록 촉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성사생활이 불가능함을 알게 되자, 외국으로부터 성직자를 영입하는.것이 급선무임을 깨달아 이 운동에 앞장섰고 이를 위해 거금을 제공하였다.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초남이에 초대하여 성사를 집행하도록 하였고, 장남 유중철 요한이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고자 하는 지향을 발하였을 때 이를 지켜주기로 결심하였으며, 같은 뜻을 지닌 한양의 이순이 루갈다와 혼례를 추진하였다.​

동정 부부는 바로 이곳에서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서로를 위하면서 4년 동안 함께 동정을 지켰다. 특히 이순이가 옥중에서 친정 식구들에게 쓴 편지를 통하여, 초남이의 가정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가정과 이웃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복음적인 삶을 살았음을 알게 되었다.1801년(음력) 신유박해 때, 유항검은 전주 남문 밖(현 전동성당)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으며, 대역부도죄인으로 여겨진 유항검의 가족은 연좌형(緣坐刑)에 따라,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은 전주옥에서, 이순이 루갈다, 유중성 마태오, 신희와 이육최는 숲정이에서 처형되었다. 유항검의 어린 자녀들은 거제도, 흑산도, 신지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특히 유항검의 막내딸 유섬이는 9살의 나이에 거제도로 유배가, 그곳에서 71세가 될 때까지 거룩한 삶을 살았던 것이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그리고 그들이 살던 초남이의 궁궐 같은 집은 파가저택(破家'滿澤)형을 받아 집을 부수고 땅을 파 웅덩이로 만드는 바람에 집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고, 늦게까지 남은 일부 웅덩이 자리 위에 지금의 성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여 거행한 시복식에서 유항검과 장남 부부인 동정부부 유중철과 이순이, 차남인 유문석, 조카인 유중성이 복자로 선포되었다.
초남이성지 안내문

성요셉성당
柳重哲(요한) 李順伊(누갈다) 童貞夫婦 生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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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소

복자 유황검의 생가터는 파가저택(破家'滿澤)형을 받아 집을 부수고 땅을 파 웅덩이로 만드는 바람에 집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고 늦게까지 남은 일부 웅덩이 자리 위에 지금의 성지가 조성되었다.

완주군과 천주교 전주교구는 지난 3월 16일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바우배기 현지에서 초남이성지 추가 발굴 착수 보고회를 가졌고 5월까지 40여일간 이어질 발굴 작업은 순교자 유해와 함께 무덤터, 유물 등에 대한 유적 보존과 정비, 문화재 지정 등을 위해 진행되고 있다. 사업부지는 648㎡로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가 맡아 진행하고 있다. 또 완주군과 천주교 전주교구는 지난 2월 문화재청을 방문, 초남이성지의 국가문화재 지정을 요청했다.

이제 생가터에서 1km정도 떨어진 초남이성지 교리당으로 간다. 교리당에는 최초의 순교자묘소, 유항검 나눔의 집, 십자가의 길, 마르띠르 카페가 있다. 

 

 

초남이성지 조선천주교 최초교리당 순교자 묘소

4월 19일 지난해 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자 유해와 유물이 200여년 만에 발견돼 큰 관심을 끌었던 완주 초남이성지를 다녀왔다. 신해박해(1791년) 때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복자의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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