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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홍주읍성 사적 제231호

by Yeongsik_Im 2023.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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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홍성군은 원도심 전통 경관 조성과 역사문화도시로서의 정체성 확립 및 관광 인프라 연계로 홍주읍성 복원·정비를 추진하고 있다.

우선 홍주읍성 전체 성곽 복원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북문지 동측부터 조양문 구간까지 멸실된 성벽구간에 대한 발굴조사를 올 9월까지 진행하고, 지난 8월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현상변경 심의 허가를 받은 '북문 문루 복원'도 올 3월부터 본격적인 착공에 들어갔다.

단기계획으로는 2025년까지 북문 문루 복원, 멸실 성벽구간 복원 및 정비, 조양문 주변 역사공원 조성, 군청사 및 홍주초등학교 철거, 객사 및 향청 부지에 대한 매입 및 발굴조사·복원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중장기계획으로 2026년부터 서문 복원을 통한 홍주읍성 내 4대문 완성, 내삼문 및 내아 등 홍주목사 관련 주요 관아건물 및 수로 복원 등으로 지역의 정체성 확립과 본격적인 관광 인프라 구축에 나서고 있다.

조양문

서해의 관문이자 홍주목의 치소를 둘러쌓은 홍주성은 1,772m에 달하였으나 현재는 남쪽의 810m 성벽만 남아있고, 홍주목의 36동에 이르렀던 관아 건물이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만 남아 있다.

홍주성이 정확히 언제 축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발굴조사 결과 홍주성역사관 뒤편토성이 나말여초에 축성된 것으로 확인되며 조선 초기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석성으로 쌓은 이후 몇 차례의 중축을 거쳤고,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 임진왜란, 이몽학의 난, 동학농민항쟁, 천주교박해 등 산 역사의 현장이며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한 민종식, 이세영 등이 홍주의병을 이끌고 전투를 벌인 곳이다. 충청도 4목 가운데 하나인 홍주목의 동헌인 안회당과 1896년 홍주목사 이승우가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며 홍주목사들이 정사를 구상하며 휴식을 취하였던 곳으로 정각은 6각형의 수상정인 여하정이 있다. 홍성군청 안뜰에는 보우국사가 왕사가 된 것을 기념으로 심었다고 전해지는 느티나무와 홍주관아의 외삼문인 홍주아문이 있다.

조양문 현판

조양문은 홍주읍성의 동문으로 조선 1870년(고종7)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세운 문루다. 홍주읍성의 문은 동문은 조양문(朝限門), 서문은 경의문(承義門), 북문은 망화문(望華門)이라 하는데 훙선대원군이 친필로 현판을 하사하였다.

북문은 역대 목사나 영장들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했는데 1894년 동학운동 때는 동학군이 여기서 처형되었다. 1906년(광무10)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洪州城)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때의 혼적이 조양문 곳곳에 보인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하려 하였으나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되었고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하여 옛모습을 찾게 되었다.

홍주성은 백제의 주류성에 비정되고 있으나 초축년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고려시대까지도 홍주성 수 개축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홍주읍성의 둘레가 533보2척(1보는 6척), 성내에 샘이 하나 있는데 여름이나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홍주읍성 홍화문(남문)지역

홍주성은 주위가 최장 1,772m에 달하였으나, 많은 구간이 전면 훼철되고 810m의 구간만이 남아있고, 성내에 있던 관아의 건물이 36동에 이르렀으나, 그 중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동헌[東軒]), 여하정(余何亭)등 4동의 건물만이 현존하고 있다.

홍주성 적대(敵臺 성벽에 달라붙은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던 곳)
홍주성 남쪽 성벽
홍주성 천년여행길

홍화문은 홍주성의 남문이다. 본래 홍주성은 4개의 문이 있었으나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3문의 바뀌었다. 고지도에는 남문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이는 남문 주변에 송림을 만들어 풍수지리상 나쁜 기운을 막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소개하고 있다.

2007〜2009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는 성문으로 확인되었고 옹성은 발견되지 않았다. 홍성군은 2013년 12월 남문을 복원한 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홍성의 앞날을 상징하는 홍화문이라 이름 지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홍화문
홍주성은 1,772m에 달하였으나 현재는 남쪽의 810m 성벽만 남아있다.
홍화문 상량
홍주읍성 남문 중건 상량문
홍주성 수성비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168호

이 비는 1824년(순조 24) 황폐된 홍주읍성 보수 완공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본래 홍주읍성 조양문 앞에 있었다.

비문에는 성의 축조과정을 적고 잇다. 홍주 지역은 바닷가에 있어서 서울의 서남쪽의 방비를 위한 중요한 지역이다. 성벽이 허물어진 것을 1823년(순조 23) 봄에 부임한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수리하기로 하고, 8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마쳤다. 완성된 성의 규모는 7리(里)였고 일을 한 날이 100여일 이었다. 비의 뒷면에는 성쌓기 작업을 주도하고 감독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이 있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홍주읍성 안내도
해자사람들 이야기

옛날 홍주읍성 남쪽 마을 남문동에 꿈 많은 청년이 실았습니다.
청년은 입신양명의 큰 꿈을 품고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청년은 벼슬길에 나가 승승장구하며 홍주목사로 부임하였습니 다.
청년은 홍주목사로 부임하며 고향 남문동에 들렸습니다.
고향마을 주민들은 청년을 뜨겁게 환영하며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청년은 홍주목사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남문동 고향마을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도 남문동은 오랫동안 평화로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변해갔습니다.
홍주읍성과 인접한 남문동은 크고 작은 전투와 외세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왔습니다.
드디어 남문동은 옛날의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고향과 홍주읍성과 나라를 되찾으려는 고귀한 영혼들의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이제 남문동의 번영과 평화는 영원할 것입니다.
어떠한 시련이 찾아와도 굽히지 않고 이겨낼 것입니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삶의 터전을 지키고 가꿔갈 것입니다.
남문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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