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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세계여행

중국 북경여행 황실정원 이화원

by Yeongsik_Im 2025.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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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가 AAAAA급 관광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북경여행 3일째, 서태후의 여름 피서지로 알려져 있는 이화원에 들렸다. 이화원(颐和园, 이허위안)은 중국에 현존하는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황실정원으로, 1750년에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원래 이름은 칭이위안(清漪园, 청의원)이었다. 

 

개방시간은 성수기(4月1日-10月31日):6:00-20:00,  비수기(11月1日-3月31日):6:00-19:00 이며, 폐문 1시간 전가지 입장하여야 한다. 4월에서 10월 사이가 최적의 방문시기이며 추천관시간은 3~4시간이다. 

 

이화원의 입장료는 20위안(비수기), 30위안(성수기)이며, 종합 입장료는 50위안(비수기), 60위안(성수기)이다. 65세 이상의 노인은 노년우대증 지참 시 무료 입장, 장애인 무료 입장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 5A급 관광지이며, 처음으로 전국 중점문물보호물로 지정된 이허위안(颐和园, 이화원)은 베이징 시내 서북부에 있으며, 시내와는 약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중국에 현존하는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황실정원인 이허위안은 1750년에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원래 이름은 칭이위안(清漪园, 청의원)이었다. 건륭(乾隆), 가경(嘉庆), 도광(道光), 함봉(咸丰) 황제의 제위 기간 동안 황제가 휴양하는 정원으로 사용됐는데,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1886년, 광서(光绪)황제가 자희태후(慈禧太后)의 요양을 위해 같은 장소에 같은 규모로 2년 동안 재건축하고 지금의 이허위안으로 개명되었다. 명, 청나라 최고 실무자들이 쯔진청(紫禁城, 자금성)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정치와 외교활동이 있을 시 이용한 장소이기도 하며, 1998년 12월에 유네스코의 의해 <세계문화유산(世界遗产名录)>에 편입됐다. 베이징관광망 누리집

이화원 인수전

인수전(仁壽殿)은 청의원 시기 근정전으로 불렸는데 청나라 건륭 15년(1750)에 지어졌고 함풍 10년(1860)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광서 12년(1886)에 증건하여 논어의 '인자수(仁者壽)'라는 ㄸ스을 따와 인수전으로 개칭하였다. 이곳은 서태후와 광서제가 이화원에서 머물면서 조정에 임하여 정사를 다스리고 공하를 받고 외국 사절을 접견하던 곳으로 이화원 청정구의 주요 건물이었다. 이화원 인수전 안내문

이허위안의 면적은 약 300만 평방미터로 완서우산(万寿山, 만수산)과 쿤밍후(昆明湖, 곤명호)로 구성돼 있는데, 전체 4분의 3이 호수로 이루어져 있고 들풀과 꽃이 도처에 깔려있으며, 숲도 무성하다. 측백나무와 소나무로 이루어진 완서우산은 영고의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며, 쿤밍후를 끼고 있는 뚝방길의 버드나무와 복숭아 나무는 강남식의 볼거리다. 나무그늘 곳곳에 흩어져 있는 건축면적이 70,000평방미터에 달하는 청(厅)、당(堂)、루(楼)、헌(轩)、각(阁)、관(馆)、전(殿)、정(亭) 등의 다양한 고대 건축물들이 3,000개나 되며, 크고 작은 정원이 20개, 건축명소에는 100개 가량이나 된다.

정원 내 진열된 4만 개의 문물들은 값진 골동품들이 많으며, 청조시대부터 사용되어 왔던 유래가 깊은 생활용품 혹은, 당시의 국가 유물들이다. 이허위안은 역대 황실정원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으며, 중국 장난(江南, 강남) 지역의 원예기술로 만들어졌다. 북방 산천의 웅장함과 물의 고장인 장난(江南, 강남)의 수려함을 갖추고 있으며, 당차고 화려한 황궁과 독특하고 정교한 백성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베이징관광망 누리집 참고

이화원 안내도
곤명호

옥한당 정전(玉瀾堂 正殿)은 광서 황제가 이화원에 머물 때 침전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올ㄱ란당 내 명간에는 자단목에 침향(沈香)이 박힌 옥좌와 어안, 산수화가 그려진 유리 울타리, 최우장선(翠羽將扇) 등의 황권 상징물이 설치되어 있어 광서가 당시 상주문을 읅고 정무를 처리하던 곳이기도 하다. 1898년 9월 16일, 광서는 이곳에서 병권을 쥐고 있는 위안스카이를 불러 '유신변법'을 후원하기를 부탁했다. 북서쪽에 위치한 칸은 광서제의 침실이다. 

청지수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 관료 미만종이 베이징 팡산에서 이 푸르고 윤기가 나며 영지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를 발견하여 미식작원으로 운반하던 중 재력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교외에 버렸다고 한다. 그후 건륭황제가 거액을 들여 이곳으로 가져다 놓았으며 '청지수)靑芝岫)'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청지수는 중국 최대의 정원치석이라고 할 수 있다. 

낙수당

낙수당은 건륭 15년(1750)에 세워졌으나, 함풍 10년(1860)에 영불연합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광서 12년(1886)에 개축되고 서태후의 원내 주거지가 되었다.

수목자친

청나라 건륭제 연간에 창건되어 광서제 연간에 중수되었으며 좌북면남의 천당전으로 앞으로는 곤명호 선작장과 맞닿아 있어 서태후가 수로로 이화원으로 올 때 여기서  등안 했다고 한다.

문창각

이화원에 있는 6개의 성관 건물 중 가장 큰 건물인데 건륭 15년(1750)에 지어졌으며, 1860년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소실되었고 광서제 연간에 제건되었다. 주각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안에는 구리로 주조한 문창제군과 선동, 룽터(전하는 바에 의하면 문창제군이 타고 다녔던 말이라고 한다)이 모셔져 있다. 문창각과 만수산 서쪽의 무성을 모시는 숙운담은 '문무보필'을 상징하낟.

야율초재 사당 야율주 묘

야율초재는 원나라의 재상으로 웅산 옆에 묻혔었는데 건륭제가 청의원을 조성할 때 그의 묘소를 그 안에 포함시키고 사당을 지었다. 1998년 야율초재 사당 동남쪽에서 야율초재의 차남 야율주의 묘가 발굴되어 유율초재 가문의 묘소로 확정되었다. 

이화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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