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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황금같은 연휴가 이어진 두번째 대체공휴일의 마지막날인 11일 연이은 가을장마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광주에 들리며 광주향교 - 창평향교 - 담양향교 - 장성향교를 경유했다.
광주향교(光州鄕校)는 광주광역시의 구도심이라 할 수 있는 전남도청이 있는 남구 구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향교로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전국의 각 지방에 설립된 관립 교육기관으로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인재를 양성하고 유풍(儒風)을 진작시키기 위해 건립된 향교는 큰 도시의 경우 대부분 구도심에 위치하고 있다.
향교비각해설
향교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전국의 주, 부, 군, 현 마다 건립되어 교육의 중추적 기능 수행은 물론 지역공동체의 풍속을 순화하는데 기여하여 왔다.
광주향교는 조선 초기 무등산 장원봉 아래에 세웠다가 호환(虎患)때문에 동문안으로 옮겼으나 빈번한 수해로 인해,성종 19년(서기 1488년)당시 현감 권수평(權守平)공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신축한 후 정유재란에 불타서 개축하고 그 후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는 호남이
인재의 보고라 할 정도로 향교를 통해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며,향중 유림이 모여 나라의 폐정을 바로 잡도록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고,임진왜란과 또 을미사변. 을사늑약 당시에는사라를 구하기 위하여 의병을 규합하는 거점이 되기도 하였던 역사의 현장이다. 향교의 연혁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고 여러 차례 증개축한 이력은 이곳의 비석과,향교 건물 내 현판으로 전하며 모두가 광주향교지에 자세히 실려 있어 조상들의 공동체를 지키려는 광주정신의 슬기를 엿 볼 수 있다. 이 비각은 철종 5년 갑인(1854년)에 문묘를 중수하면서 향교 밖에 비각을 마련 모두 7기의 비석을 비각 안에 세웠으나 세월이 흘러 비각이 쓰러지고 비석의 머리에는 이끼가 끼고 받침돌에는 잡초가 자라는 지경에 이르자 1935년에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일자 4칸 건물의 비각을 새로 마련하고 비석 7기와 곁의 한 칸에 중건기 념비를 세웠고,1976년에 또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문묘와 부속건물을 중수하면서 성금자 방명을 새긴 광주향교중수비가 세워져 모두 9기의 비가 비각 안에 들어섰는데,좌측으로부터 차례로 비명과 지은 사람은 아래와 같다.
비석 1호 광주향교중신기(光州鄕校重新記 1563년) 본문: 고봉 기대승(奇大奸).음기 : 회재 박광욱(朴光玉)
비석 2호 광주향교중수기(光州鄕校重修記 1804년) 겸재 기학경(奇學敬)
비석 3호 광주향교중수비(光州鄕校重修碑 1855년) 노사기정진(奇正鎭)
비석 4호 광주향교중수기(光州鄕校重修記 1882) 연재 송병선 (宋乘辯)
비석 5호 광주명륜당중수기(光州明倫堂重修記 1843년) 운석 조인영 (趙汝水)
비석 6호 광주향교중수기(光州鄕校ffi修記 1893년) 광주목사 민선호(問芮就)
비석 7호 광주향교집강권군일제위성비 (光州鄕校執網權君一濟衛 聖碑 1843년) 광주목사 조철영 (趙微水)
비석 8호 광주향교비각중건기(光州鄕校碑間重建記 1935년) 전 장례원경 박봉주(朴鳳柱)
비석 9호 광주향교중수비(光州鄕校重修碑 1976년)중수추진위원회
광주향교의 건물내력을 시민들에게 올바로 알리고자 비석마다 비문 해설을 요약정리하여 게시하오니 선조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호하여 문화 시민의 긍지를 지켜 나갑시다.
서기 2014년 11월 광주 향교 재단
광주향교 비각에는 친일반민족 행위자인 박봉주(1868-1936)가 지난 1935년 지은 ‘광주향교비각중건기’라는 글이 적혀 있는데, 비각 앞에 단죄문을 설치되어 있다.
1398년(태조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서석산(瑞石山) 장원봉(壯元峰) 아래에 창건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호환(虎患)이 있어서 동문 안으로 옮겨 세웠다가, 1488년(성종 19)에 수해(水害)로 현감 권수평(權守平)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은 정유재란 때에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그 뒤에 중건한 것이다. 1974년에 대성전을 보수하고 단청하였으며, 1976년에 동·서재와 1978년에 명륜당을 보수하고 1981년에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소장 전적은 189종 306책으로 주로 경서와 문집류이며, 필사본인 ≪관안 官案≫·≪광주유림안 光州儒林案≫ 등은 이 지방의 향토사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대한민국구석구석
사마시 합격자들의 모임 장소였던 사마재는 문회재(文會齋)라는 이름으로 광주천변에 세워졌던 것을 1987년 광주향교에 복원하였으며 현재는 향교의 강의실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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