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위업을 선양하기 위해 건립된 현충사는 국민학교때 수학여행을 다녀 왔던 곳이니 거의 50년만에 다시 와보는 것 같다.
수학여행때 현충사를 참배하고 충의문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던 기억이 새롭다.
현충사 관람시간은 하절기(3월~10월)는 09:00~18:00, 동절기(11월~2월)는 09:00~17:00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하고 있다.
관람료와 주차비는 무료이며 걸어서 관람하는데 약 1시간 정도 소요된다.
현충사는 관람시 음료수나 음식물, 돗자리 반입이 하용되지 않고 자전거나 인라인스케이트 등을 타고 입장할 수 없다. 애완견을 데리고 입장할 수 없다.
15인 미만 관람객은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 정시에 실시하는 정기해설을 이용할 수 있고 그 이상의 단체는 해설을 예약시 최소 1주일전에 예약해야 한다. (연락처:041-539-4618)
이해가 부족한 초등학교 저학년 및 미취학 아동의 단체해설 예약은 불가하며, 학생 및 군인 30인 이상 단체는 사당에서 참배진행이 이루어진다.
다가오는 민족 최대의 명절 한가위를 맞아 현충사관리소는 월요일 휴관일과 관계없이 추석연휴 9.9(금)~ 9.12(월) 정상 개방하나다고 하니 관람에 참고하시기 바란다.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이 혼인 후 무예를 연마하며 구국의 역량을 기르던 장소로 서른 두살 되던 선조 9년(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순국하신지 108년이 지난 숙종 32년(1706년) 이곳에 공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고, 1707년 숙종임금이 현충사 (顯忠祠)라 사액하였다.
그 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일제시대인 1932년 동아일보가 주관하여 온 겨레의 정성으로 사당을 다시 세웠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매년 4월 28일에 온 국민의 뜻으로 탄신제전을 율려 공을 추모하여 왔다. 1966년부터 1974년까지 공의 위엄율 기리고자 박정회 대통령의 지시로 성역화사업율 시행하였으며 2008년부터 2011년까지 현충사 유적정비 사업을 통해 충무공이순신기념관율 건립하였다.
이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932년 민족 성금으로 고쳐 지은 후 구 현충사를 옮기고 1967년 성역화 사업으로 새로 진은 것이다.
구 현충사는 숙종 32년(1706)에 아산 유생들의 청원으로 지어졌으나 고종 5년(1868)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다. 1931년에 이르러서는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가의 채무로 이충무공 묘소의 위토(제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농지)가 경매에 부쳐지자,정인보, 송진우, 김병로 등 민족 지사들은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결성하여 이충무공의 유적 보호에 앞장섰다. 채무 변제를 위하여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성금 모금 운동이 펼쳐졌고,온 국민의 호응을 얻어 채무를 변제하게 되었다. 채무를 변제하고도 돈이 남자 ‘이충무공유적보존회’는 1868년 헐렸던 현충사를 1932년 다시 짓고 사액 현판을 달았다. 1966년 현충사 성역화 사업으로 현재의 사당을 다시 크게 지으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구 현충사 안내문
정려는 조선 시대에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게 임금이 내린 현판을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에 걸어 두고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본받게 한 정문(旌門)을 말한다. 이 정려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하여 강민공 이완,충숙공 이홍무,충민공 이봉상,효자 이제빈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집은 충무공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살던 집으로 이후 종손이 대대로 I960년대까지 살았던 곳이다. 400여 년간 종손들이 살면서 부분적으로 늘려 짓거나 고쳐 지었으며,집 뒤편에는 이순신의 위패를 모신 가묘가 있다. 매년 이순신이 전사한 날인 음력 11월 1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전시관과 교육관을 갖춘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은 2011년 건립되었다. 전시관에는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에 관한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교육관에서는 이순신 장군 정신과 위업선양을 위한 강의와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함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비장한 각오의 장계를 올리고
해남 어란포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진도 벽파진으로 옮겨 어란포에서 한밤중 장군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적선을 격퇴시킨다.
이후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말하고 명량에서 13척의 전선과 군사를 정비하여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도도 다카토라가 지휘하는 왜선 31척을 격퇴하여 다시 해상권을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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