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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향교와 서원/전라남도

나주향교 - 한국의 향교 탐방 152 전라남도 나주

by Yeongsik_Im 2023.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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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개의 향교 중 아직 방문하지 못한 향교가 많이 남은 곳이 전라남도 지역인데 2023년 12월 2일 광주 결혼식장에 가는 길에 좀 일찍 출발하여 나주향교와 남평향교를 방문했다. 조선시대 나주읍성의 서문인 영금문 밖에 있었던 나주향교는 2007년 7월 31일 사적 제 48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나주향교는 주차장 쪽 고직사 출입문을 이용하여 입장하여야 했다. 입구에 작은 주차장이라도 조성되어 있고 고직사가 있는 곳이라 이곳을 평시 출입문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외삼문을 활짝 열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협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대성전, 우측으로 명륜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나주향교는 지난번 소개해 드린 경주향교와 같이 제향공간인 대성전을 앞쪽에 두고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뒤쪽에 두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라는것이다. 전묘후학의 배치방식인 향교는 전국적으로 많지는 않지만 대부분 평지에 건립된 향교로 서울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주향교, 정읍향교, 경산향교 등 이 있다.

또한 나주향교에는 1701년(숙종 27)에 창건한 계성사(啓聖祠)가 향교 북동쪽의 안쪽에 있었다고 한다. 계성사는 공자의 아버지 숙양흘과 공자의 네 제자인 안자, 자사, 증자, 맹자의 아버지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현재는 전주향교, 제주향교에만 남아있고 춘추에 계성사제를 모시고 있다.

나주향교 비석군 우측 끝에 있는 비석이 충복사유허비

 

나주향교에는 1597년(선조 31) 당시 대성전 수복이었던 김애남이 임진왜란으로 향교가 없어질 위험에 처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위패를 금성산으로 옮겼다가 왜병이 물러간 후 다시 봉안하여 이를 위해 사우를 건립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의 충복사유허비가 남아 있다.

현재 나주향교 외삼문 우측에는 1920년대에 헐린 충복사터를 조성중에 있다.

나주향교 이성계 은행나무

 

먼저 나주향교의 정문인 외삼문을 보기 위해 가는 돌담길에는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이성계 은행나무가 대성전 동무 옆에 우똑 서 있다.

 

 

나주향교 대성전 이성계 은행나무

나주향교에 들리기 전 나주읍성의 서성문 영금문(映錦門)을 돌아 보다 성루에서 나주향교에 우뚝 솟아 있는 은행나무를 발견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 심었다는 은행나무였다. ​ 은행나무는 벌

hyanggyo.tistory.com

나주향교 표지석과 하마비

 

나주향교 하마비에는 대소인원 개하마(大小人員 皆下馬)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대인 소인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다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것이다. 향교마다 대소인원하마(大小人員下馬), 과차자개하마(過此者皆下馬), 또는 하마비(下馬碑)라고만 새겨진 하마비도 있다.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와 문묘, 궐문 앞에 세워놓은 석비로, 향교 역시 문묘에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으로 여겼기 때문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나주향교 외삼문

 

외삼문은 밖에 설치되어 있는 3칸인 문으로 外三門이라 부른다.

향교나 서원의 출입문을 셋으로 나누어 만든 것은 신의 출입과 사람의 출입을 구분하기 위함으로, 3개의 문 중 중앙은 신문이고 양쪽의 문은 인문(人門)이라 하여 신문은 평시에는 닫아 두는 것이 상례이고, 인문은 열어 두어 일반 관람객의 내왕을 허용하고 있는데 삼문은 출입할때 東入西出이라 하여 동쪽으로 들어가서 서쪽으로 나와야 한다.

외삼문 상량
나주향교 내삼문

 

출입문이 3칸인 문으로 향교 안 대성전에 설치되어 있어 內三門이라 부르는데 역시 동입서출하여야 한다. 분향례와 춘계·추기 석전대제 등의 제례를 봉행할 때 사용한다.

내삼문 안쪽
대성전 서무 옆 은행나무
1963년 9월 2일 보물 제394호로 지정된 나주향교 대성전
성균관 대성전

 

대성전은 향교의 중심건물로 공자를 중심으로 한 27위의 위패를 모신 공간이다. 건물의 크기나 모양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대성전 중에 으뜸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유교건축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대성전 벽흙은 공자의 고향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말과 임진왜란 이후 성균관을 다시 지을 때 나주향교 대성전을 참조하여 지었다는 말이 전해온다.대성전은 조선시대에 나주향교가 건립되면서 처음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670년 소두산 목사에 의해 대성전 중수가 이루어졌고 고종 6년(1869)에 대성전을 비롯하여 대대적인 보수를 거쳤으며,순조 33년~헌종 3년(1833-1837), 고종 32년(1906), 2008년에 대성전 도리이상 해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주향교 대성전 안내문

나주향교 서무
나주향교 동무, 우측에 보이는 나무가 이성게 은행나무이다.
나주향교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성전과 명륜당 담장과 협문
명륜당과 동·서재

 

명륜당 뒤로 보이는 봉우리는 나주의 진산 금성산 장원봉이라 부르는데 나주향교에서 장원급제자가 많이 나와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나주향교 명륜당

 

나주향교의 명륜당은 서울 성균관의 명륜당처럼 가운데 중당의 지붕이 좌우의 익당보다 높게 조명되어 있다. 명륜당의 중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보호수 지정 당시 수령 500년 명륜당 비자나무 2012년 7월 17일 보호수로 지정됐다.
나주향교 서재
나주향교 동재
서재 뒷편
서재 뒷편
명륜당 좌측 연지
명륜당 졍면으로 보이는 대성전
충효관과 전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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