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향교와 서원/경상북도

의흥향교 한국의 향교 160 경상북도 군위군

by Yeongsik_Im 2024. 8. 31.
반응형

한국의 향교 탐방 160번째 대구 군위군 의흥면 읍내길 89-27에 위치하고 있는 의흥향교를 8월의 마지막 날 방문했다. 9월 10일 추기 석전대제를 앞둔 의흥향교는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향교 건립 당시의 원판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더욱 아쉬웠다.   


일부 향교는 향교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일요일에도 개관하고 월요일에 휴관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골이 따분한 향교를 누가 찾아 오겠냐며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지 말고 향교의 공간을 문화체험관광 자원으로 개발하여 유교문화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시대적 조류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의흥은 통일신라 시대 때 하리, 중리, 파립, 우보 등 4개 면을 통합하여 구산현(龜山縣)이라 하였고, 1018년 안동부의 속군으로서 의흥군(義興郡)이 되었다가, 1390년 부계(缶溪)현을 속현(屬縣)으로 거느리는 독립된 의흥군이 되었다. 의흥향교는 태조 7년(1398) 의흥면 읍내리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선조 34년(1601)에 다시 지었다. 인조 19년(1641)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광풍루

광풍루는 1968년에 중수했고 2019년 9월에 사업비 4억 원를 투입해 새롭게 단장하고 중건 준공식을 가졌다. 광풍루의 옛 사진을 보니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였으나 향교의 누각이 대부분 3칸이나 5칸이어 (4칸인 향교의 누각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태인향교의 만화루가 있다.) 이 때 정면 5칸으로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광풍루를 중건하면서 의흥향교의 건물들은 대성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 지은 건축물로 보인다.

광풍루 편액
담 넘어로 보이는 명륜당
명륜당
명륜당
동재(東齋) 사물재(四勿齋)
서재(西齋) 삼성재(三省齋)

의흥향교는 앞쪽에 유생들의 교육 장소였던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를 두고 뒤편의 제향 공간에 대성전과 동무와 서무를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방식을 따르고 있다. 다만 대성전은 명륜당 동재 뒤쪽으로 약간 우측면에 자리 잡고 있다. 

인조 19년(1641) 지금의 위치로 옮기며 세워진 의흥향교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맞배지봉이다. 평면을 보면, 앞쪽에 기둥만 있는 반 칸 폭의 툇간을 두고, 뒤쪽에 6칸 크기의 위패를 모시는 넓은 공간을 두었다. 
지봉 골격을 이루는 뼈대는 5개의 도리가 있는 지봉틀로 되어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되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모서져 있다.

임진왜란 때 돈암 손기남(遯巖 孫起南)이 불타고 있는 대성전에서 성인들의 위패를 손상 없이 꺼내서 지게에 지고 선암산 바위굴로 옮겨 8년간 모시다가 선조 34년(1601)에 다시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이 위패는 6·25 전쟁 때에도 옮겨졌으며, 경상북도의 향교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립 당시의 위패이다.

동재와 서제 뒷면
유림회관 일신당(日新堂)
모성비각

돈암손선생 모성교의비각은 숙종 44년(1718) 의흥군수 조하성이 돈암의 충효유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향교 앞에 모성교의비와 비각을 세워 두차례의 중건을 거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돈암손선생 모성교의 비각(遯巖孫先生慕聖效義碑閣) 표지석 2002년

고려 건국공신 손긍훈(孫兢訓)의 후손인 돈암 손기남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대성전이 불에 타자 목숨을 걸고 의흥향교의 오성위판과 경서를 지게에 짊어지고  30리 떨어진 의흥현 선암산 암굴에 모셔놓고 8년간 보존하였고 전란이 끝난후에는 의흥현 파전리 용연정(龍淵亭)에 옮겼다가 의흥향교 중건후 제 자리에 복원시켰다.

 

돈암손선생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오성위판은 임진왜란이 끝난후 인근 향교 재건시 표본이 되었으며, 의흥향교는 경상도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건립당시의 원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향교이다.

遯巖孫先生慕聖效義碑 돈암손선생모성교의비
우측 비석은 대성전 중수기념비비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