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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선생 생가터 - 포항시 오천읍 문충리

by Yeongsik_Im 2024.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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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들판 논에는 벼가 잘되고 오천에는 먹을 만한 고기가 있어...

포은 정몽주선생 생가터 - 포항시 오천읍 문충리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시로 알려져 있는 ‘저성역야우(諸城驛夜雨, 저성역의 밤비)'에는 자신의 고향 영천과 오천에 대해 명시한 대목이 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포항 오천이 고향이므로 호를 따로 ‘오천(烏川)’이라고도 하였으며 지주사(知奏事) 때부터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다. 문충동에서 테어나 구정리에 기거하다가 우년기에 외가인 영천으로 이주하였다. 포항시 오천읍 구정리 오천서원이 있던 자리에 정몽주유허비각이 남아 있다.

 

今夜諸城驛 (금야저성역) 오늘밤 저성역에 머무르면서

胡爲思舊居 (호위사구거) 고향생각 왜 나는지  

遠遊春盡後 (원유춘진후) 봄 다간뒤 멀리와서

獨臥雨來初 (독와우래초) 첫 비올때 홀로 누었네

永野田宜稻 (영야전의도) 영천 들판 논에는 벼가 잘되고
烏川食有魚 (오천식유어) 오천에는 먹을 만한 고기가 있어
我能兼二者 (아능겸이자) 나에게 두가지를 모두 있건만
但未賦歸歟 (단미부귀여) 돌아가는 글을 짓지 못하는구나.

포은 정몽주 생가터 이정표

오천읍내에서 해병대 구 사격장을 지나 14번 국도 정몽주로를 따라가다 보면 기림사로 가는 기림로와 만난다.기림로를 따랄 조금가다보면 우측으로 냉천을 넘어 문충들과 문충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포은 정모주 선생 생거 터가 있는 문충1리 마을회관 앞에는 100여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文忠洞歌(문충동가)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자고로 유명한 우리 문충동 정포은 나신곳이 이 곳이로다
산수도 가려하고 인심좋으나 아이들 교육 없어 유감이로다 

문충1리 마을회관

문충리는 신라 시대에는 芽烏支縣에 속하였으나, 고려말에는 이곳에 많은 선비들이 공부한 곳이라 하여 士居里라 부르다가 선비가 太師벼슬을 한 후부터 師居里라 개칭 하였다 한다. 또한, 정몽주 선생이 이곳에서 탄생하였다고 하여 포은선생을 추앙하기 위하여 선생의 시호를 따서 지명을 文忠이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회관 앞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포은 정몽주 선생 생가 터를 알리는 조형물과 안내판, 포토존 등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딱 봐도 초라하기 짝이 없고 관리도 잘 안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포은 정몽주 본향 오천 문충' 표지석은 앞에 세워진 안내판과 나무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포은 정몽주 본향 오천 문충 표지석

포은 정몽주 선생 생가 터 안내판에는 '옛 부터 전해 내려 오는 포은 선생 생가는 고려말 索居里(삭거리) 士居里(사거리)로 불려지다 1401년 태종 원년에 시호를 文忠公(문충공)으로 하사 받은 후 1430년경 세종 당시 포은 선생의 숭고한 뜻을 후세들에게 전하고자 마을 지명을 文忠洞(문충동) 본가가 위치한 골짜기를 文忠谷(문충골)이라 바꾸어 지금에 이른다,'라고 안내하고 있다.

2018년 9월 7일 세워진 고향집터 표지석에는 포은 정몽주 (圃隱 鄭夢周 1337~1392)에 대한 소개와 함께 그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시로 알려져 있는 저성역야우(諸城驛夜雨)가 새겨져 있다.

포항시 남구 오천읍 문충리 151-12번지 우리 고장의 역사적 정신적 표상인 포은 정몽주 (圃隱 鄭夢周)의 사상을 후세에도 역사의 장으로 길이 남기고자 '포은을 사랑하는 사람들' 주관으로 고향집터 마련 기부금 모집을 하여 2018년 9월 7일 세운 고향집터 표지석이다.

생가터를 확인해 보기 위해 가보았지만 가는 길은 이정표도 없다. 차가 한대 지난갈만한 좁은 길 한쪽에는 유년시절 돌을 밟고 말을 탔다는 승마석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인근 용산리 용산숲에는 포은문화원이 있는데 이어서 소개한다.

승마석

마을 입구에는 2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살펴보니 문충리에 충산보를 만드는데 기여한 김익조와 진대락을 기리는 비석으로 1937년에 건립되었다.

수원김익조 경주진대락 충산보 창설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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