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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관아지

by Yeongsik_Im 2024.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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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시는 조선시대 밀양관아를 복원하기 위해 2008년에 관아터를 발굴하였고, 발굴 조사에서 밀양관아 관련 건물터 위치 및 축조시기 등이 밝혀졌다. 관아터에서는 건물터외에도 배수구, 당장터, 기둥구멍 등이 확인되었으며, 고려·조선시대 유물도 함께 출토 되었다. 발굴 조사를 통해 이곳에 조선시대 밀양관아가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어 “밀양관아지(密陽官衡地)”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 270호로 지정되었다.

관아터 발굴 결과와 조선시대의 밀양고지도, 문헌기록 및 타 지역 관아 매치를 종합하여 조선시대 밀양관아 복원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관아의 중심건물인 동헌 정청(正廳)은 아북산에서 뻗어 내린 지맥이 형성하는 명당(明堂)에 자리 잡았으며, 정청 뒤는 노송이 우거진 후원이었다. 관아 남쪽에는 솟을삼문 형식의 내삼문(內三門)이 있었으며, 내삼문 안쪽에 동헌(東軒) 정청이 남향으로 건축되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밀양고지도에 보이는 동헌 정청의 서북측 건물은 북별실(北別室), 동북측 건물은 책방(冊房)이 거처하던 매죽당(梅竹糖)으로 추정되었으며 북별실과 매죽당은 동헌 정청과 같이 남향으로 지었고, 솟을삼문 서쪽에는 방문자의 대기 장소인 헐소(歇所)가 있었다. 조선후기의 밀양관아에는 동헌 정청, 매죽당, 북별실, 내삼운 외에 연훈당(延薰堂), 전월당(餞月堂), 신당(新堂) 등 여러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파악할 수 없어 복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밀양 관아지는 조선시대 나랏일을 처리하던 밀양 관아가 있던 자리이다. 향토지 밀주구지에 1479년 밀양읍성을 지을 때 관아 건물 100여 칸이 마련되었다고 나와있다. 본래 건물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렸고, 광해군(1611) 때 밀양 부사 원유남이 관아가 있던 원래 자리에 새로 지었다.수령이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인 동헌(東軒)은 근민헌(近民軒)이라 불렀고, 부속 건물로 서헌과 별실이 있었지만 자세한 용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밀주징신록에 '내동헌과 외서헌이 별도로 있는데, 내동헌은 부사 부인이 거처하던 곳’ 이라고 기록된 점으로 미뤄 부사의 내실이나 별실 등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에는 이 밖에도 연훈당, 전월당, 신당등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나 규모를 알 수는 없다.밀양 관아지는 1895년 지방관제가 개편되면서 명칭이 군청으로 바뀌었다. 1927년 삼문동에 밀양군청이 새로 지어지면서 밀양읍사무소, 밀양시청, 내일동사무소 등으로 이용 되다가 2010년에 옛 관아로 복원되었다.
밀양관아지 안내문

응향문

응향문(凝香門)은 밀양관아의 정문으로 2층 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2층에는 북을 매달아 아침 저녁으로 문을 열고 닫을 때에 북을 울렸다고 한다.

관아의 중심 건물인 동헌(東軒)은 부사가 행정을 처리하던 곳으로 근민헌(近民軒)이라 불렀다.
근민헌
매죽당

매죽당은 아사 별실의 하나로 부사의 비서사무를 맡은 책방이 거쳐하던 집이며, 고을 원의 자손들이 독서하는 곳 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건한 당초의 건물은 허물어져 영조 51년(1775 년)에 부사 정존중(鄭存中)이 다시 세웠다가 한말에는 이곳을 부사의 집무실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매죽당
납청당
납청당은 부사가 외부인을 만나는 별실으로 북별실이라 했다.

밀양관아지 응향문 우측에는 3·13밀양면만세운동 기념비와 세워져 있다. 밀양 장날이었던 1919년 3월 13일 오후 1시 영남지방에서는 최초로 밀양만세의거가 일어났던 밀양인의 의기가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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