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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다음의 무거운 형벌, 유배(流配)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

by Yeongsik_Im 2021.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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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다음의 무거운 형벌, 유배(流配)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

화창한 봄날 유배지로 떠나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조선시대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었으며, 유배살이 또는 귀양살이라 불리웠다. 유배는 ‘죄인을 멀리 귀양 보낸다’ 는 뜻이지만 유와 배는 서로 의미가 다르다. 유(流)는 아주 먼 곳으로 보내 살게 한다는 뜻이며,배(配)는 자유로이 활동할 수 없도록 어느 곳에 짝지어 배속시킨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4월 5일 장기읍성과 장기향교를 향해 가던 중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장기로 452에 위치한 포항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을 둘러보았다.

장기는 경성을 중심으로 유3천리 지역에 해당하는 빈해각관에 해당되어 조선 후기 의금부에서 죄인의 배소를 지정할 곳을 기록한 의금부노정기에도 장기를 유배지로 지정함으로써 조선 내내 유배지로 널리 활용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장기로 오는 유배길은 한양 - 남태령 - 안성(죽산) - 충주 - 문경 - 상주 - 함창 - 의흥 - 신령 - 영천 - 경주 - 장기로 연결되는 영남대로를 이용했고 이 길은 서울에서 860리이고 하루 95리를 걸어 9일 반이 걸려야 도착하는 긴 여정이었다.

장기는 신라 때는 지답현(묘齒懸)인데,남으로는 경주의 감포 경계까지 북으로는 현재의 구룡포와 호미곶까지를 관장하던 동해안의 중심지역이었다. 관내에는 신라 때에 설치한 시령산성 만리성 등의 고대 산성들과 고려 현종 2년(1011년)과 조선 세종 21년 (1439년)에 쌓았다는 장기읍성이 있다. 장기는 또한 조선시대 유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형벌제도로 유배형이 실시되고 세종 때「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이 정비됨에 따라 장기는 경성(京城)에서 유3천리의 빈해(서울에서 30개 역 밖에 있는 바닷가 고을)지역에 해당되어 유배지로 자주 활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등에서 장기로 유배가 결정된 유배인은 모두 149회 211명(남자 172명,여자 39명)으로 확인된다. 이는 단일 현(懸)지역 유배인 수로는 국내에서 제일 많은 숫자이다. 조선시대 유배 형기(刑期)는 원칙적으로 종신형이었으며,정치범으로 단죄된 유배자는 임금의 사면이나 권력의 변화,정세의 변동이 없는 한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도록 하였다. 대부분 왕의 사면이나 정세의 변동으로 다시 되돌아가 정계에 복귀하여 승승장구한 사람들이 많으나,영의정을 지낸 퇴우당 김수흥처럼 이곳에서 객사한 유배인도 있고,이시애의 난에 연루된 사람들의 가족들처럼 끝까지 복권되지 않아 지역민으로 살다가 한과 애환을 품은 채 죽어간 사람들도 있다.

장기 유배문화체험촌을 둘러보고 있는 방문객들의 모습
망향교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 안내소와 주차장(전기차 충전 가능)에서 망향교를 건너면 바로 장기에 유배된 대표적인 인물인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고자 조성된 유배문화체험촌이다. 우측으로는 다산, 좌측으로는 우암의 장기 유배생활을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다산의 장기 유배생활

다산 정약용은 1801년 1월 19일에 터진 신유박해 사건에 연루되어 18이년 2월 27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다산은 그 다음날 유배 길을 떠나 3월 9일 장기에 도착하여 마현리 구석골 성선봉《成善封》의 집을 배소로 지정받았다. 다산은 황사영 백서사건 연루 의혹으로 그해 10월 20일 다시 서울로 압송되기까지 7개월 10일(220일》동안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장기에 온 다산은 틈나는 대로 장기읍성의 동문에 올라 해돋이를 구경하거나 가까운 신창리 앞바다에 나가 어부들이 고기 잡는 걸 구경하기도 했다. 마을사람들이 보리타작 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담배농사를 짓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바닷가에 갔을 때는 처음으로 해녀의 물질을 구경했으며,오징어와 물고기를 보고 험한 정계에 뛰어들어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처지를 우화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장기천을 따라 신창리 바다쪽으로 녹음벽수의 장기숲이 펼쳐져 있었다. 다산은 그 숲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시를 통해 표출하기도 했다.

조선조 장기 정배
장기현

18세기에 제작된 여지도(興地圖)에 실린 장기현 모습이다. 장기현은 지금의 포항시, 구룡포읍, 장기면, 호미공면 동부, 동해면 상정리 • 중산리 • 공당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장기읍성 내에 있었다. 이 고을의 진산은 치소의 서쪽에 위치한 거산(거산:동악산)이다. 읍성은 평지가 아니라 산에 의지해서 쌓은 석성(石城)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둘레는 2천9백80척이다. 읍성안 자봉산(紫鳳山) 부근에 있던 자봉정과 욕일당은 1481 년(성종12년》에 현감 최영이 지은 것이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소봉대는 모양이 거북처럼 생긴 바위산이 한쪽은 육지에 접하고 있고, 삼면은 바다에 둘러싸여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신라의 어느 왕자가 이 곳 경치에 취해 3일 동안 놀았다 한다.

북쪽에 위치한 달배공옥장(冬己背幸牧場)은 조선초기부터 말을 키웠던 유서 깊은 옥장이다. 뇌성봉수는 북으로 발산봉수에 응하고, 남으로 복길봉수에 응한다. 모이산에 있는 모이현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이 재를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뇌성봉수가 있는 뇌성산에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 때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석성(石城)이 있고, 이 산에서는 뇌록과 인삼 등 7가지 보물이 난다고 한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독산은 거북이 엎드린 것처럼 생겼다.

우암의 장기 유배생활

우암(尤庵) 송시열은 제2차 예송사건으로 덕원에 유배되었다가 숙종 원년(1675년) 6월 10일 장기현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장기에 도착한 우암은 장기성 동문 밖 마산리 사인 오도전의 집에 위리안치(圍 離安置)되었다. 그로부터 1679년 4월10일 거제도로 이배되기까지 우암은 4년 여간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우암이 장기에 유배를 올 때 부실과 노복들 뿐 만 아니라 두 동생인 시도와 시걸,아들 기태,그리고 손자 주석과 증손자 일원 및 유원을 데리고 왔다. 이는 비록 유배객의 몸이지만 가족과 노복까지 대동할 정도여서 당시 우암의 입지를 반증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장기초등학교 부지(장기면 읍내리》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우암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현재까지 자생하고 있다.

우암이 장기에서 귀앙살이를 하는 동안 조정의 관리는 물론 재야에 묻힌 수많은 인맥들이 장기를 찾아와 우암의 배소를 드나들었다. 지역의 토호들은 물론 심지어 인근 관아의 수령들도 앞 다투어 장기를 방문하는 등 장기는 그야말로 조선 후기 야당 정치의 1 번지였다고 한다.

우암 거소 주인이었던 오도전은 4년간 열심히 우암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장기현의 훈장이 되었다. 우암이 장기를 떠난 후 28년 만에 우암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오도전,오도종,황보헌, 이동철, 오시좌,김연,서유원,오도징 등 장기 향림들과 대구의 구용징,전극화 등이 주축이 되어 죽림서원을 건립하였다. 이들은 장기에서 노론 인맥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인맥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까지 존속되었다.

우암의 배소에는 수백 권의 서책이 비치되어 있었고,독서를 하는 여가에 시를 짓기도 했는데,이들 원고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상자 속에 고이 간직했다. 4년간의 장기현 유배생활 중에 수많은 저작을 했다. 특히 주자대전차의, 이정서분류 라는 명저 뿐 아니라 1675년 6월에는 취성도를 제작했다. 또한 이곳에서 문충공포은정선생신도비문 외에 300수 내외의 시와 글을 지어 다양한 심회를 형상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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