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방방곡곡/대구경북

세계문화유산 국가민속문화재 경주 양동마을

by Yeongsik_Im 2021. 7. 17.
반응형

경주 양동마을(慶州 良洞마을) Yangdong Village, Gyeongju

국가민속문화재제189호 National Folklore Cultural Heritage No. 189

경주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전통문화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 최대 규모의 전통마을이다. 경주손씨와 여주이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씨족마을로 5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양민공 손소(1433-1484)가 풍덕류씨와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경주손씨가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여주이씨는 찬성공 이번이 손소의 사위가 되면서 이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이처럼 혼인한 신랑이 처가를 따라가서 사는 풍습이 있었다. 그동안 두 집안에서는 우재 손중돈(1463-1529)과 회재 이언적(1491-1553) 등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였다.

마을 앞으로는 안강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설창산 산줄기에 마올이 들어선 모양새가 독특하고 아름답다. 산에서 뻗어내린 네 줄기의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150여 채의 옛집들이 굽이굽이 들어서 있는데, 이 중에서는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기와집이 네 채나 남아 있어 눈여겨 볼만하다, 집들은 대개 ‘□’자모양인데,이는 조선 중기 영남지방의 일반적인 가옥 형태이다. 다양한 가옥의 조호는 우리나라 전통역사마을의 생활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을 주변의 산,들판T 강 등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함께 하늘의 별처럼 늘어서 있는 마을의 고택은 진풍경이다. 양동마을은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1984),세계문화유산(2010》, 형산강팔경(2016)으로 선정되어 보전되고 있다.

양동마을 향단 보물 제412호

양동마을을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마을 언덕 가장 앞쪽에 자리잡고 있는 향단(보물 제412호)이다. 양동마을의 대표작인 고택으로 가장 먼저 둘러보려 했으나 아쉽게도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이집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인 중종 38년1543 에 병환 중인 모친을 돌볼 수 있도록 임금님이 지어준 집이라고 전한다. 이언적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동생 이언괄이 형님 대신 노모를 모시고 살던 집으로 이언괄의 손자인 향단 이의주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상류주택의 일반적 격식에서 과감히 벗어난 형식으로 편의성을 위해 행랑채,안채,사랑채가 보두 한 몸체로 이루어지고 2개의 마당을 가진 특이한 구조다. 집주인의 개성을 반영한 독특함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집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무첨당 無忝堂 Mucheomdang House 보물 제 411 호

보물 제 411호인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 종가에 16세기 중엽에 지어진 제청(祭應)으로 그의 맏손자인 무첨당 이의윤(1564-1597)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뒤쪽 높은 곳에 사당이 있고,동쪽에 안채,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본채가 있다. 무첨당은 제사를 지내는 제청의 기능이 강했으며,독서와 휴식,손님 접대와 문중회의를 했던 큰 사랑채다. 대청 오른쪽 벽에 걸린 ‘좌해금서'라는 현판은 ‘영남에서 선비가살고 있는 마을’ 이란 뜻으로 집권 전 이곳을 방문한 흥선대원군이 죽필로 직접 쓴 것이다

무첨당 현판
좌해금서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죽필로 직접 쓴 것이다.
내당과 사당

무첨당을 나와 대성헌으로 가는 길에 길목을 지키고 있는 딱새 암컷 한마리가 나를 반긴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34호인 대성헌은 조선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해 좌찬독 홍문관 교리를 지낸 물와 이재직의 셋째 아들 이능단이 철종 원년(1850)에 분가하면서 지은 것이다. 앞쪽의 빼어난 산봉우리 성주봉을 바라보고 지어졌는데 집의 이름도 ‘성주봉과 마주하고 있다’는 뜻으로 '대성헌’이라 하였다고 한다.

집의 구성은 ㄱ 자형의 안채에 -一자형의 사랑채와 一자형의 행랑채가 모여 □자형을 이루는 형식으로 19세기 양동마을에서 유행하던 주거형식이다. 사랑채의 두 칸 대청 앞쪽에 여덟 짝의 문을 달아 네 짝씩 접어 올린 점이 특이하다.

心水事 Simsujeong Pavilion

국가민속문화재 제81호 National Folklore Cultural Heritage No. 8

양동마을 심수정 대문

심수정은 여주이씨 문중에서 조선 중기 학자 농재 이언괄(1494〜1553)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명종 15년(1560)경에 지은 정자이다. 이언괄은 벼슬을 마다하고 형님인 회재 이언적 대신 노모를 모신 분으로 ‘시끄러운 세상에 뜻을 두지 말고 귀먹은 듯 살아가라’는 뜻의 농재라는 호를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지금 있는 정자는 철종 때에 행랑채만 빼고 화재로 모두 타버려 1917년 원래 모습을 살려 다시 지은 것이다.

‘마음을 고요한 물과 같이 가지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으로 안락정과 강학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마을의 서당

역할을 했다. 마을 안팎에 있는 10개의 정자 중 규모가 제일 크며,여주이씨 집안의 종가인 무첨당과 향단을

바라보기 위해 건물을 ‘ㄱ’자로 배치하고 누마루를 두었다

양동마을 심수정
보수중인 관가정, 관가정은 성종과 중종 때의 명신이자 청백리로 유명한 우재(愚齋) 손중돈이 이 마을의 경주손씨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날씨도 덥고하여 양동마을을 다 돌아볼 수는 없을거 같아 보물들을 위주로 둘러보려 했는데 향단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관가정은 보수공사중이었다. 양동마을은 대부분이 언덕을 오르 내리며 돌아봐야 하는데 한여름의 더위에 지쳐 있는데다가 맥이 쭉 빠진다. 더 이상의 양동마을 관람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관람을 하지 못하는 곳들은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안내판이라도 설치해 두면 더 좋지 않을까?

출장중에 자주 지나는 곳이기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날에 다시 들리기로 하고 양동마을을 떠난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