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향교 대구] 대구향교
2021년 7월 21일 대구광역시 향역에 있는 대구향교와 칠곡향교, 현풍향교를 둘려보기로 했는데 현풍향교는 시간관계상 다음에 방문하기로 했다.
대구향교의 특징이라면 향교의 건물들이 모두 평지에 건립되어 있는데 특히 제향영역인 대성전이 명륜당 바로 옆에 좌묘우학으로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향교들은 경사지에 위치한 경우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이거나 평지일 경우에는 전묘후학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평지에 건립되어 있는 전주향교, 경주향교, 정읍향교 등이 전묘후학의 배치형식이다.
확인해본 결과 대구향교 역시 교동에 있을때는 전묘후학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나 1932년 시가지를 확장하면서 현재와 같이 자리 잡았다고 한다.
밀양향교의 경우가 명륜당 좌측 높은 곳에 제향영역인 대성전이 위치해 있는데 공자와 저명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의 지형이 낮아 훌륭한 인물이 나지 않는다며 제례공간의 위치를 옮긴 경우이다.
대구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교동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으며 선조32년(1599년)에 달성공원으로 옮겨겨 지었다가 선조 38년(1605년)에 불길한 징조가 있다고 하여 다시 교동으로 옮겨 지었다가 193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1973년 11월부터 1974년 10월까지 명륜당과 정삼문 사무실을 철근 콘크리트로 크게 다시 고쳤으며, 1990년 동재,서재, 낙육재를 복원했고 1991년 영사재를 복원하였다. 1992년 4월부터는 유림회관, 정삼문, 지하주차장, 전통정원을 착공하여 1995년 9월 준공하였다.
대공향교에 외삼문을 들어서면 잘 정리되어 있는 정원과 함께 공자상이 보인다. 공자상은 자매도시인 중국의 청도시가 기증한 것이다.
명륜당은 인조(仁祖) 3년(1625년)에 중건하였고, 교육사업으로 1910. 5. 1 대구공립농림학교(현 대구자연과학고등학교)가 개교하여 1910.10. 4 대봉동(현 사대부고)로 이전 하였으며, 해방 이후인 1945년 대성중학원(이듬해 대성중학교로 승격)을 설립하였고, 1947년에 대구대학교 설립을 인가받아 명륜당에 개설하였다. 그 외 건국고등공민학교, 대구여자사범대학, 대구경리여자중학교가 명륜당에서 개교하였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명륜당의 부속건물로 유생(儒生)들이 수학(修學)을 할 당시에 기숙사로 사용하던 건물로 교동에서 명륜당을 창건할 당시 함께 세웠으나 향교가 현 위치로 이건한 후로 건립을 하지 못하였다가 1990년 낙육재 건립시에 함께 건축하였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 맟배지붕이다.대성전이 화려한 다포식을 취한 것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대구향교 대성전에는 공자를 정위에 모시고 사성(안자,증자,자사,맹자)를 배향하고 있으며 동종과 서종에는 신라조 이현, 중국 이현, 고려조 이현, 조선조 14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매월 삭망에는 분향례를 올리고, 춘추중월(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의식을 봉행하고 있다.
동무와 서무는 대성전의 부속건물로써 1948년까지는 송조이현과 동국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으나 지금은 위패를 대성전으로 옮겨 동서종에 모시고 있다. 따라서 현재는 서고와 전사청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방문화를 풍요롭게 했던 영남 낙육재는 1721년에 설립된 관립도서관의 효시로서 재생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는등 학문 연구에 큰 공적을 남긴 곳이다. 경종 원년(1721년)경상감사(지사) 조태억이 인재 양성과 문풍진흥을 목적으로 당시 대구부 남문밖(현재 대구시 남산동 문우관에서 동산양말공업사 일대)에 설립하였는데, 이곳에서 경상도내의 유능한 선비들을 선발하여 기숙시키며 독서와 학문 연구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영조8년(1732년)조현명 감사가 중수하였고,순조7년(1807년)에는 윤광안 감사가 재내의 서고인 장서각을 창건하였으며 다시 고종조 엄세영 감사가 1897년에 중수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지방제도가 개편되고, 일제 통감부 설치 후에는 조선인들의 모든 학교 운영을 방해함으로 인해서 낙육재를 철폐시키고, 그 재산으로 협성학교(현 경북고등학교 전신)를 설립하고 소장되었던 장서는 모두 764책으로 현재 대구 시립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낙육재는 독서,시,부,제술연구 등의 기능을 가졌으나 문묘나 사묘가 없는 것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1990년 10월 7일 대구광역시 보조금과 대구향교재단 자체 자금으로 향교 경내에 재건하였다.
양사재의 창건당시 위치는 현재의 교동이며 향교 구내 동신문 바깥이다. 조선시대 영조 병술(1766)에 판관
(시장》김노에 의해 設立되었으며,영조 정해(1767) 7월에 관찰사(지사)김응순이 기문을 쓰고 무자(1768) 늦봄에 판관 김노도 기문을 쓰다.
매년 춘추로 분향내의 유생들을 선별하여 기숙케 하고 강학하였으며, 향교에서 향시를 치를시는 과장으로 사용한 곳이다. 그 후 1991 년 12월 28일 이 곳에 양사재를 복원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상층 32평 하층 46평으로 재건하였으며 상층은 대구향교 여성회의 교육도장으로 사용하고 았고, 하층은 향교 서예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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