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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권율장군 이치대첩비

by Yeongsik_Im 2022.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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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번국도 대둔산로를 따라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두 도에 걸쳐있는 아름다운 대둔산의 풍경을 보며 배티재 고개를 넘어가면 인삼약초의 고장 충청남도 금산군이다.

인삼약초 산업의 고장 금산군을 알리는 아치 상징물을 지나 1,5km 정도 내려가면 좌측에 이치대첩지이다.

이치(梨峙)는 순우리말 ''배티재''의 한자 이름이다.

이 배티재는 대둔산 중허리를 넘어 전북 완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상 중요한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를 휩쓸고 승승장구하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2만여 병력의 왜적이 호남으로 나아가 군량미를 얻고자 이곳을 넘으려 하였고, 이 때 먼저 길목을 지키고 있던 권율 장군이 1,500여 군사를 이끌고 결사전을 벌인 끝에 적을 섬멸하여 그들의 호남진출을 막아 내었다. 이 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보다 앞서는 임진왜란 최초의 육지에서 승리한 싸움이다.

고종 3년(1866) 금성면 상가리에 이치대첩비(梨峙大捷碑)와 대첩사(大捷祠)를 함께 세워 그 뜻을 기렸는데, 1944년 6월 일제에 의해 폭파되었고 1964년에 진산면 묵산리에서 이치를 바라볼 수 있는 산 중턱에 다시 세워졌다.

외삼문 이치대첩문
대첩비각

임진왜란 당시 명상 권율(權慄,1537-1599)의 이치대첩을 기념하는 '원수권공이치대첩비(元帥權公梨峙大捷碑)’이다. 이치(배티 또는 배재)는 대둔산을 넘어 전북 완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임진왜란 당시 2만여 병력의 왜적이 이곳으로 진격하였는데, 먼저 길목을 지키던 권율 장군이 약 1,500명의 군사로 적을 섬열하여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 이에 고종 3년(1866) 금성면 상가리에 이치대첩비(梨峙大捷碑)와 대첩사(大捷祠)를 함께 세워 그 뜻을 기렸는데,1944년 6월 일제에 의해 폭파되었다. 현재의 비석은 1964년에 진산면 묵산리에서 이치를 바라볼 수 있는 산 중턱에 다시 세운 것으로,연재(淵齋)송병선(宋秉璿)이 짓고 송성용이 쓴 비문을 다시 새긴 것이다. 1961년에는 금곡사(金谷祠)라는 이름의 사당,비각 및 안내판, 내.외삼문,담장등도 건립하였다
이치대첩비 안내문

1944년 6월 일제가 항일유적 말살정책으로 폭파하여 파괴된 비석

1991년부터 성역화계획이 수립되어 사당·비각 및 안내판 이축, 내삼문·외삼문·담장을 건립하였다.권율장군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長興面) 석현리(石峴里)에 있다.

내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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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삼문과 대첩비각
충장사
충장사 내부 모습과 권율장군 초상화

이치대첩과 관련한 문화유산은 총 3건으로, 금산 이치대첩지(충청남도 기념물 제154호), 이치전적지(전라북도 기념물 제26호) 그리고 권율장군이치대첩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5호) 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금산군과 이치대첩추진위원회, 금산문화원이 이러한 이치대첩의 의미를 되새기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이치대첩지에서 매년 이치대첩기념제가 개최되고 있고, 금산군과 전라북도 완주군은 각종 세미나와 전문가 포럼을 통해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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