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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소수서원 · 선비촌

by Yeongsik_Im 2023.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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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영주 소수서원은 3년전 가을에 방문하여 블로그에 간단히 소개했었다. 당시에는 시간이 촉박해 잠시 돌아볼 수 밖에 없어 아쉬웠었는데 지난 11월 11일 영주를 지나는 길에 다시 한번 들려 당시에 둘러보지 못했던 곳을 중심으로 관람했다.

 

 

 

영주 소수서원 Sosuseowon Confucian Academy

영주 소수서원 紹修書院 Sosuseowon Confucian Academy in Yeongju, South Korea.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위치한 소수서원은 1543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5호로 지정

hyanggyo.tistory.com

 

영주 소수서원 관람요금은 선비촌, 소수박물관 특별기획전시실 통합요금으로 어른은 2,000원, 30인 이상 단체 관람객은 1,660원이다, 기타 관람요금은 소수서원 홈페이지 참고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 선비촌에서는 관람편의를 위하여 문화관광해설을 하고 있다. 해설사의 전문 안내와 함께하는 관람은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느낄 수 있다. 문의 : 054-639-5852 (소수서원 관광안내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景濂亭

 

소수서원의 입구인 사주문 우측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가운데 하나인 경렴정과 그 뒤로 수령이 500년 정도로 알려진 소수서원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그 뒤로는 소백산맥에서 발원한 죽계가 소수서원을 휘감아 흐르고 있고 경자바위 주변에 터를 잡은 취한대가 있다.

 

중종 38년(1543)에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만들면서 함께 세운 경렴정은 소수서원의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이다.

‘경렴'은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이를 추모한다는 뜻으로 주돈이의 호인 염계의 첫 글자 '렴'과 우러러 사모한다는 '경모’ 에서 '경’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현판 중 해서 현판은 이황의 글씨이고. 초서 현판은 이황의 제자이면서 초서의 대가인 고산 황기로의 글씨이다.

정자 내부에는 이황과 주세붕 등이 자연을 노래한 시를 적은 시판이 걸려 있다

 

경렴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가운데 하나로, 소수서원 원생의 풍류 문화틀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경렴정은 서원과 주변 자연을 이어주는 공간에 있는데 이곳은 죽계를 끼고 주변을 조망하기에 좋은 장소이어서 원생이나 유림의 모임, 시회 개최,풍류와 심신 수양 등의 활동을 하였다,

초서 현판은 이황의 제자이면서 초서의 대가인 고산 황기로의 글씨이다.
경렴정 내부에 걸려있는 현판들

 

죽계 경자바위와 취한대

죽계와 취한대

 

자연을 벗하며 시을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인 취한대는 퇴계 이황이 터를 닦고 취한대라 이름을 붙였다. 이는 옛 시 송취한계(松聚寒溪)에서 따 온 것으로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이다.

소백산맥에서 발원하여 소소서원을 휘감아 흐르는 하천으로 소수서원의 경관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인 죽계는 소수서원에 관한 여러 문헌 기록에서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죽계는 고려시대 후기의 유학자인 안향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시대 후기의 문신인 안축의 고향이면서 안축이 지은 경기체가 죽계별곡의 무대이기도 하다.

경자바위

 

주세붕은 敬(경)이라는 글자 한자를 바위에 새겨 남겼다. 경자는 선비의 덕목을 나타낸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安珦(안향)을 공경하고 기리는 마음을 후대에 전한다는 뜻도 있다.

'敬'자 위의 '白雲洞(백운동)' 은 소수서원의 본래 이름이다. 소수서원의 명륜당인 강학당에도 '백운동' 현판이 걸려있다.

소수서원 은행나무

 

수령이 약 500년 정도로 알려진 소수서원 은행나무는 소수서원이 세워진 무렵에 심어졌다고 추정된다. 이 은행나무는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리는데, 은행 열매처럼 많은 인재를 배출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향교와 서원에는 예외 없이 은행나무가 있는데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던 정신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그러나 살구나무 대신 은행나무를 심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은데 이에 대해서 살구나무의 '행'과 은행의 '행'이 같은 글자여서 오래 살지 못하는 살구나무 보다 천 년 이상 사는 은행나무를 선택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향교와 서원에 있는 은행나무는 유교와 관련된 우리나라의 정신문화를 간직한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잇다.

취한대

 

취한대는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다음 해인 명종 4년(1549)에 흙과 돌을 쌓아 올려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곳이다. 경자바위 주변에 터를 잡고 소나무, 잣나무, 대나무를 손수 심고 이름을 취한대라 지엇다. '취한'은 푸른 연화산의 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으로 송취한계(松聚寒溪)에서 따 왔다. 취한대는 공부에 지친 원생들이 잠시 휴식하던 곳으로, 현재 이곳에는 1986년에 지은 정자가 있다.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

소수서원 문성공묘

 

서원이나 향교는 크게 강학영역과 제향영역으로 나누어 지는데 대부분 전학후묘(前學後廟)라 하여 강학영역을 앞에 두고 제향영역을 뒤에 배치하는게 일반적이다. 성균관이나 전주향교 처럼 평지에 설치된 향교의 경우 그 반대로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 방식을 따른 곳도 있다.

그러나 소수서원은 서쪽을 중시하는 우리의 전통사상에 따라 강학공간 측면 서쪽 제향공간을 배치한 독특한 사례이다. 제향역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문성공묘와 전사청, 영정각 등의 건물이 있는데, 문성공묘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문성공 회현 안향의 위패를 몬신 사묘로 1542년 주세붕이 세웠다. 문성공묘를 사(祠)라 하지 않고 묘(廟)로 격을 높여 부른 것도 흔하지 않다.

강학당 보물 제1403호

 

학문을 닦고 베우던 공간인 강학영역은 강학당을 중심으로 지락재, 학구재, 일신재, 직방재가 있다.

건물배치는 하학상달(下學上達), 즉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 한다.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를 시작으로,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재,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그리고 깨어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이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明倫堂)이라 불리는 강학당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배출된 인재가 4,0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1543년에 건립된 강학당 내부에는 명종임금이 내려준 친필 편액이 걸려있으며,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장서각은 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소수서원 문성공묘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서 있는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강당이다.

 

강학당 정면에는 백운동 편액이 걸려 있다.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창건시에는주자의 여산 백록동서원을 본따 백운동 서원이라 불렀다.

명종어필 소수서원 현판

 

명종어필 현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의 현판으로 조선의 13대 명종임금이 직접 쓴 글씨를 새진 것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직방재
지락재
학구재
장서각
영정각

 

영정각은 소수서원에서 보관하는 영정을 모시기 위해 1975년에 지은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의

기와집이다. 조선 시대에는 도동각 또는 영정실이라고 하였으며. 안향의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서원에 영정각을 두는 것이 드문 일이기는 하나 소수서원에는 보물급 영정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영정각을 건립하였다.

영정각 내부의 중앙 좌측에는 주자학의 시조인 주자의 영정, 우측에는 우리나라 주자학의 선구자인 안향의 영정, 왼쪽에는 소수서원을 세은 주세붕의 영정, 능력과 덕망을 겸비한 문신인 한음 이덕형의 영정,

오른쪽에는 청백리의 표상인 오리 이원익의 영정과 조선 후기 사상계를 이끌었던 미수 허목의 영정이

있다. 이 가은데 안향의 영정은 국보 제111호, 주세붕의 영정은 보물 제717호로 지정되었다.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있으며 전시된 영정은 복제본이다.

일영대

 

해시계로 알려져 있는 일영대는 맑은 날, 윗 부분 돌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있다고 한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영주 선비촌

죽계교

 

소수서원에서 죽계교를 건너면 영주선비촌이다.

영주 선비촌은 선현들의 학문 탐구의 장소 및 전통 생활공간을 재현하여 우리 고유의 사상과 생활상의 체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설립된 영주 선비촌은 와가 및 초가 등을 혼합한 우리 고유 전통마을로 민속시설(정려각, 산신각, 연자방아 등 토속신앙시설 등), 강학시설 (강학당 등 선비들의 학문 탐구시설), 저자거리 (옛날 장터의 재현) 등의로 재현되어 있어 잊혀져가는 수준 높은 선비문화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죽계 징검다리

 

선비촌 입구에는 열부각과 충복각이 세워져 있다.


조선말 우리 고을의 반남 박씨댁 규수가 여홍 민씨 가문으로 출가했으나 남편이 병으로 일찍 죽어 홀로 시집살이를 할 때, 이웃 천석꾼 김아무개가 집요하게 연정을 품고 모함과 뜬 소문을 퍼뜨리니 참다못해 관에 호소했으나 받아 주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므로 그 결백을 드러내었다.이 과정을 지켜 본 집안 하인이었던 고만석이 마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고자 상경하여 우여곡절 끝에 임금에게 알려 신원을 회복하게 되었다.그 후 소수서원이 주체가 되어 전국 유림들의 발의를 얻어 두 사람의 가상한 뜻을 기리고자 나라에 상소하여 순조 22년(1822)에 열부 박씨에게 정려를 내렸고, 고만석에게는 철종 14년(1863) 정려를 내려, 열부각과 충복각을 세우게 되었다.
열부각 충복각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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