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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투혼이 살아 숨쉬는 곳, 의령 충익사

by Yeongsik_Im 2022.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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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초의 의병 발상지인 의령은 4월 한 달간 ‘의병 문화의 달’을 운영해 군민 축제 분위기와 함께 ‘의병 정신’으로 대동단결하고 있다.

지난 2일 의령읍 시가지를 비롯헤 충익사, 서동생활공원 일원에서 의병탑 건립 50주년 기념 점등식과 함께 ‘4월 의병문화의 달’ 행사가 시작됐고 의병 활동의 모습을 생생히 재현한 유등, 다양한 색감의 조명을 입힌 축등, 손수 한지를 이용해 제작한 600여 개의 한지등, 수문장 배치 등을 통해 의령군 전체를 의병 정신이 깃든 웅장한 의병도시로 탈바꿈시켰다.

4월 9일 의령 충익사를 시작으로 의병박물관 - 의령향교 - 솔바위 - 정암루 - 의령관문공원을 돌아보았다.

 

 

의병의 고장 의령 의병박물관

4월 9일 의병의 최초 발상지인 의령 충익사를 시작으로 의병박물관 - 의령향교 - 솔바위 - 정암루 - 의령관문공원을 돌아보았다. 의병박물관은 기존의 의령군민문화회관 내에 위치하고 있던 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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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탑

의령천의 의병교를 건너면 가장 먼저 의병탑과 마주하게 된다.횃불을 상징하고 있으며 중간에는 백색고리 18개가 있다. 곽재우 장군과 휘하 장군 17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1972년에 건립된 의령의 상징이자 의병의 숭고한 정신이 담긴 의병탑은 올해로 건립50주년이 되는 해로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의병탑건립취지문 뒷면에는 성금기탁자 명단이 새개져 있다.

趣旨文
의병탑은 임진(1592년)4월 왜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엇을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과 휘하 17 장수의 호국·충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2년에 건립하였다.
의령은 의병의 발상지요 의병의 투혼이 살아 숨쉬는 곳이기에 의병의 정신과 행동을 배우고 본 받으며 그 넋을 영원히 추모하기 위하여 성금으로 이 탑을 건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군민의 정성과 일부 뜻있는 자의 성원이 담겼으니 표식이 없어 성금 기탁자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늦게나마 이 비에 밝혀 두는 바이다

홍살문
충의문
충의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2호

의령 충의각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곽재우와 그의 아래에서 활약한 장군 17명의 이름, 본관. 호. 벼슬 등을 기록한 명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다.원래 이 건물은 1910년에 합천 이씨 문중에서 의령읍 동동리의 관찰사를 지낸 이중하를 기리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 이다. 1972년에 재부산향우회에서 이를 매입하여 충익사 인근 으로 옮겨 왔고,1978년에 충익사 정화 사업을 하면서 이곳에 자리잡았다.건물은 앞면 2칸,옆면 1칸의 규모로,옆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 아래에 달린 목재 구조물의 높이가 매우 높고,지붕의 면적도 넓다. 극락세계에 가기를 기원 하는 마음에서 상여 모양을 본떠 지은 건물로,장식성과 예술성 그리고 기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로 평가된다.
충의각 안내문

충의각에는 곽재우장군과 휘하 17명의 장수 이름, 본관. 호. 벼슬 등을 기록한 명판이 보관되어 있다.
곽재우장군 유적정화기념비

유적 정화기념비는 의병 공적을 후손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비로 1978년 건립됐다.

홍의문
충익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장군과 그 아래 17장령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 곳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던 망우당 곽재우(1552〜1617) 장군과 그 휘하 17장수 및 무명 의병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곽재우 장군은 명종 7년인 1552년 8월 28일 외가인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출생하였다. 1585년 (선조 18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의 내용이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가 있다하여 파방되자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며 자연과 더불어 시를 지으며 초야에서 지냈다.1592년 (선조 25년) 4월 13일 왜군이 침입하여 국토를 유린하자「나라를 지키는 일을 관군에게만 맡길 수 없다」하여 4월 22일 전국에서 가장먼저 의병을 일으켜 왜군의 침략을 막았다.장군은 항상 붉은 옷에 백마를 타고 신출귀몰하여 홍의장군이라 불리었으며,휘하 17명의 장수와 수천의 의병과 힘을 합쳐 낙동강과 남강의 주요 거점을 오르내리며 적을 물리쳤다.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기강을 비롯한 의령의 관문인 정암진, 현풍, 창녕, 영산, 화왕산성 등의 전투에서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왜군의 보급물자 차단과 전라도 진격을 저지함으로써 왜군의 전쟁수행에 막대한 차질을 안겨주었다.​

왜란 이듬해에 성주목사를 거쳐 진주목사와 경상우도방어사를 지내고 왜란 후에는 오위도총부 부총 관을 비롯해 한성부우윤,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사후에 충익이란 시호와 함께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1972년 이래로 매년 의병창의일인 4월 22일 의병제전 행사와 더불어 추모행사를 거행해 오고 있으며, 음력 8월 28일에는 장군의 탄신다례를 올리고 있다.한편 이곳 충익사는 1978년 12월 22일 준공되었으며,정부에서는 2010년에 의령군민의 청원을 받아들여 6월 1일을 국가기념일인 ‘의병의 날’로 지정하여 의병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충익사 안내문

경건한 마음으로 향을 올리고 머리를 숙인다.

충익사 연못

모과나무는 원래 중국에서 자라던 나무로,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전역에서 관상 또는 열매 수확을 위해 심어 왔다. 봄에는 선홍색의 꽃이 피며,가을에는 노란색의 둥근 열매가 열린다. 열매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나는데 이 때문에 과실주로 담그거나 차로 만들어 마시기도 한다. 또한 말린 것은 한방에서 ‘목과**’라 하여 약재로도 쓰인다. 모과는 생김새는 못생겼지만 다른 어떤 과일보다 쓰임새가 많고 향이 좋아 생김새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의령 충익사 모과나무의 나이는 약 500살로 지금까지 조사된 모과나무 중 가장 나이가 많다. 나무의 높이는 약 12m,사람 가슴 높이 부분의 둘레는 약 4m 정도이다. 나무의 줄기에 근육 모양으로 울퉁불퉁한 골이 있는데 오래된 모과나무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이 모과나무는 원래 가례면 수성마을에 있었으며,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당산나무로 마을 주민들에게 민간 신앙의 대상이었으나,1978년에 충익사 정화 사업을 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와 심었다.
의령 충익사 모과나무 안내문

의령 충익사 모과나무 경상남도 기념물 제83호
충익사 모과나무

충익사 뒷편에는 의병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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