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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 임재화 유허비 · 덕계공 비각

by Yeongsik_Im 2025.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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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훈부도사 덕계 임공 유허비 - 포항시 남구 장기읍

양포항에서  장기로를 따라 읍내길을 이용 장기읍내로 들어가다 보면 좌측 임중1리 마을 입구 맞은 편에 덕계 나주 임재화(林再華)공의 유허비각인 덕계공 비각이 있다. 

 

정면 1칸·측면 1칸 규모의  비각(碑閣)은 시멘트 담에 둘러쳐져 있으며, 비각 정면 상단에는 '덕계공비각'이라고 현판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충훈부도사덕계임공유허비 (忠勳府都事德溪林公遺墟碑) 라고 새겨진 지붕돌을 얹은 비석이 보관되어 있다. 자료를 찾다 보니 2015년 비각을 중수하기 전에는 덕미각(德美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덕계 임재화는 장기향교를 옮겨지을 때 대대로 살던 자기 집터를 내놓아 향교 재건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장기향교는 임재화가 희사한 터에서 존속되다가 장기읍성 내의 구객관 건물로 다시 이전되었고, 옛 향교터는 현재 장기초등학교 부지로 이용되고 있다.

덕계공 비각 입구 한쪽에는 덕계공 행장(비문요약)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행장(行狀)이란 사망한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을 말한다.

공의 휘(諱)는 재화(再華), 자(字)는 대욱(大郁)이니 독계는 호(號)다. 영조 무신년(1728)에 하마리 본가에서 태어나니 곧 직므의 향교자리다. 공은 어릴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제사 때도 초상처럼 머리를 풀고 재계했다. 자제들에게도 제사 잘 모시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라고 가르치면서 4대 봉사를 꼭 해야 한다고 당부하더라.

집안 아려운 사람 돕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더니, 수 백금을 내서라도 족보에 일가 종속(宗屬)들의 이름이 빠지지 않도록 배려하더라.

 1785년 고을의 향교가 낡아서 옮길 일을 의논할 제 공이 대대로 살던 집터를 흔쾌히 희사하고 따로 800냥을 의연하니 유림에서 이를 향첩에 기록하고 을사유안(乙巳儒案)이라 부르더라.  1792년 큰 흉년이 들어 나라가 어려울 때 식량을 내어 한 고을을 구제하니 만민이 우러렀다. 그 충의에 나라에서 충훈부랑을 제수하는데도 받지 않앗으니 이 갸륵한 사실이 삼강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말년에 이곳 덕림에 정자를 짓고 둘에에 대나무와 화초를 가꾸고 벗들과 고요히 노니노니 사람들이 지상선인에 비기더라. 경오년(1810) 11월 11일에 하세하니 원근 불문코 온 고을이 울엇다더라. 하나 명정에 는 유명(遺命)에 따라 처사로만 적혀 았었더라.

덕계공 행장 (비문요약)

덕계공 유허비는 포항시가 2025년 향토문화유산으로 4월 3일 지정 예고했다.

향토문화유산은 국가 또는 시 시정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자원 중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큰 유무형의 자료를 보존·관리·활용하기위해 지정하고 있다.

 

덕계공 유허비는 조선 후기 장기 지역의 명망가(名望家)로서 향교 재건 및 주민 구휼 등에 많은 재물을 희사하여 찬탄을 받은 인물인 덕계공 임재화(1728~1810)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유허비(遺墟碑)로, 『을사유안(乙巳儒案)』(1790), 『망양안(望讓案)』(1908) 등의 문헌에도 해당 인물의 행적이 전한다. 

 

조선 후기 사회지도층이 도덕적 의무를 솔선수범한 사례를 잘 보여주며, 당시 지역사회의 동향 및 재지 사족의 기부문화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충분한 역사 ‧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므로 향토유형문화유산 지정 대상으로 선정됐다고 한다.

덕계공비각
충훈부도사덕계임공유허비

덕계공 유허비각 출입문 좌우측에는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얼을 전하기 위해 입향조, 본관의 유래 및 세계(世系), 현창할 조상(직·방계)를 작성하여 소개하고 있다.

입향조와 본관의 유래 및 세계
현창할 조상(직·방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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