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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방방곡곡/전북특별자치도

5·18 최초 희생자 故 이세종 열사 추모비 · 전북대학교 민주화 벽화

by Yeongsik_Im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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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1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980년 5월 18일 민주화운동 당시 최초 희생자가 전북대학교 농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이세종 열사(당시 20세)인 것으로 조사돼 ‘5·18민주화운동 사망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에 등재했다고 밝혔다.

故 이세종 열사가 '5·18 민주화운동 첫 희생자'란 사실이 무려 44년 만에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이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이 광주·전남에서 전북을 포함한 전국적인 민주항쟁으로 시간적·공간적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마련됐다.

6월 10일 전북대학교 사범대 3호관 한쪽에 세워져 있는 고 이세종 열사 추모비를 찾았다.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싶다"라고 새겨져 있는 추모비 앞에서 그 대신 하늘을 바라 보며 우리 시대의 뜨거웠던 1987년 6·10 민주항쟁을 잠시나마 떠올려 보았다.

1985년 5월 17일 작은 비라도 세워 두려 했지만 1985년 7월 20일 군부독재정권에 의하여 김제 연정리로 옮겨졌고, 1989년 추모사업회가 발족되어 처음 만들었던 비를 찾아 햇살 가득한 곳에 다시 세웠다. 어려운 시절을 께게 견더온 비를 그대로 상단에 올렸다.

상단의 비에는 강희남 목사의 글씨로 '고 리세종 투사 추모비'라고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너 민주의 들풀이여! 건지인의 영원한 넋이여!'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당시 국문과 이정민 학새의 추모시 '부활을 꿈꾸며'가 새겨져 있다.

전북대학교는 2020년 6월 12일 故 이세종 열사의 추락 장소인 제1학생회관 도로변에 안내판을 설치했다.

가로 50Cm, 세로 1m 10Cm 크기로 세워진 안내판에는 상단에 당시 이 열사가 계엄군에 쫓겨 사망한 채로 발견된 역사적 장소임을 알리는 문구와 주요 약력이 표기됐고, 중단에는 이세종 열사 추모비 문구인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가 새겨져 있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1시경, 제1학행회관에서 농성을 벌이던 이세종 열사(농학과 2학년 재학)는 온몸이 멍들고 피투성이인 채 주검으로 발견됐다.

검찰은 단순 추락사로 발표했으나 당시 주검을 검안했던 전북대 이동근 교수는 추락 전 계엄군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했다. 결국 1998년 10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보상심의회에서 5·18 사망자로 인정되어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2002년에는 순천향대 이민규 교수에 의해 " 5·18 최초의 무력 진압은 바로 전북대이고 5·18 최초의 희생자는 바로 이세종"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당시 기사도 신군부의 검열에 의해 삭제된 사실도 밝혀졌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980년 5월 18일 민주화운동 당시 최초 희생자가 이세종 열사인 것으로 조사돼 2024년 3월 11일 ‘5·18민주화운동 사망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에 등재했다.

고 이세종 열사 추모비
고 이세종 열사 추모비 뒷면

이세종 열사는 1995년 2월에 전북대학교 명예졸업장을 수여 받았고,1998년에 있었던 3차 신청에서 이세종은 5·18 관련 사망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1999년 4월 5일에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치됐다.

이세종 열사의 유품은 2010년 유가족이 전북대 역사관에 기증한 것이다. 전라고 재학시절 모습이 담긴 사진과 친필이 남아있는 고교 교재, 전북대 농과대학 수험표 등과 이 열사가 사망 당시 입고 있었던 피 묻은 의복, 시신을 덮었던 교기 등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전북대학교 민주화 벽화

전북대학교 사범대 3호관

이 민주화 벽화는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봉준 장군이 자주 · 민주 · 통일된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으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대적 가치를 문학적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대학 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벽화로 보존되고 있으며, 1988년 설립된 '전북지역 청년미술 공동체'가 같은 해 그린 첫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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